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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현들의 학문과 사상을 연구 개발하는사단법인 퇴계학 부산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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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록

退溪門人錄

月川 趙穆
朝鮮 中宗 18년(1524년) 禮安 月川에서 출생하여 退溪先生의 薰炙를 받아 學者로 大成한 趙穆의 字는 士敬이요 號는 月川이며 본관이 橫城이니 吏曹參判의 증직을 받은 趙大春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즐겨 12세 무렵에 이미 四書와 三經을 다 읽은 월천은 15세 때에 퇴계선생 門下에서 깊이 있는 학문을 수학하게 되었고 이후부터 『朱子大全』과 『近思錄』 등을 읽으면서 經學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으며, 28세 때인 明宗 6년(1551년) 生員試에 합격하고 그 다음해에는 生員會試에 합격했으나 官職에 뜻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文科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그 후 宣祖 元年(1567년) 44세 때 成均館의 추천에 올라 集慶殿 參奉에 피임되었으며 1570년(庚午) 퇴계선생께서 易簀함에 3년 동안 布帶를 하고 素食으로 喪禮를 받드느라고 鄕里 陶山을 떠나지 않았다.
이 무렵 童蒙敎官에 除授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은 채 선생의 言行總錄을 짓고 年譜를 기초하였으며 脫喪한 후 52세 때인 선조 8년(1575년) 學行으로 천거되어 宗簿寺 主簿와 工曹佐郎, 奉化縣監 등에 제수되면서 관직에 나가게 되었다.
맡겨지는 관직 모두에 부임하지는 않았지만 뒤이어 宜寧縣監을 비롯하여 高靈⦁新寧縣監과 慶尙⦁全羅⦁忠淸道都事 盈德縣令 錦山⦁丹陽⦁陜川郡守, 工曹正郎, 襄陽府使, 尙衣院正, 禮賓寺正, 掌樂院正, 工曹參議 등을 제수 받은 후 工曹參判에 올랐다.
壬亂이 일어나기 전 陜川郡守로 재임 중일 때에는 당시 朝廷에서 日本과 講和하려함을 알고 宣慰使 李德馨을 통하여 「李汝受(鵝溪 李山海의 字)가 領相의 지위에 있으면서 이런 일을 한단 말인가」 고 日本과의 강화를 배척하기도 한 월천은 官職에 천거될 때 議政府와 吏曹가 同議하여 學行으로 著名한 선비 5人을 천거할 때 首位를 차지할 만큼 학행이 뛰어났던 것이다.
당대 京鄕 各處의 文人과 碩士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던 퇴계선생 門徒 중 月川이 柳西厓, 奇高峯, 鄭寒岡과 함께 退門의 高弟子였던 것은 뒷날 『月川文集』 序文을 지은 許眉叟의 글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官職 보다 學問에 큰 뜻을 두어 『困知雜錄』, 『朱書抄』, 『閒中雜錄』, 『月川文集』 등 저서를 남긴 그가 선조 39년(1606년) 逝去하니 享年이 83세였으며 사후 陶山書院과 醴泉 鼎山書院, 奉化 昌海書院의 퇴계선생 廟宇에 從享되었다.
思蓭 朴淳
朝鮮 中宗 16년(1522년) 서울에서 右尹 벼슬을 지낸 忠州人 朴祐의 아들로 출생한 그의 字는 和淑이고 號는 思蓭이다.
어릴 때에는 花潭 徐敬德에게 훈학을 받다가 성년이 되면서 退溪선생 門下에서 수학하여 31세 때인 明宗 8년(1552년) 庭試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서 宣祖 때에는 大提學과 右議政, 領議政 등 고위관직을 역임한 정치가이며 경세가이다.
文科에 급제한 후 司憲府, 司諫院, 弘文館 등 三司의 요직을 두루 거쳐서 大任을 맡았던 사암은 사간원과 사헌부에 재임 중일 당시 후일 그와 같이 領議政에 올랐던 藥峯 李鐸과 함께 왕실의 척신으로 조정의 정사를 어지럽히던 尹元衡의 실정을 공박하고 퇴임을 진정하는 상소문을 올리는 정의파이기도 했다.
그리고 宣祖 3년(1570년) 12월 선생 서거 시 弘文館 大提學에 재임 중이던 사암은 議政府와 동료 문인들의 권고로 퇴계선생의 誌文과 行략을 지어 보냈으며 양조 판서를 거쳐 52세 때인 宣祖 5년(1572년) 右議政으로 승진되었다가 2년 후 領議政에 올라 14년 동안 國政을 주도하면서 士林政治의 기틀을 다졌다.
그러나 李栗谷⦁成牛溪 등과 막역한 친교를 가졌던 그는 영의정 재임 중 東西分黨이 싹트기 시작하여 후일 西人의 대표적인 인물인 領首로 지목되었으며 東西分黨이 확연히 들어난 후 관직에서 물러나 永平 白雲山 아래에서 詩文을 즐기면서 은거하였다.
특히 詩를 잘 하고 漢唐體 문장에 뛰어났던 그는 『思蓭集』 6권을 저서로 남겼으며 1589년 67세를 일기로 서거한 후에는 文忠公의 시호가 내리고, 개성 花谷書院과 영평 玉屛書院에 제향되었다.
雪月堂 金富倫
朝鮮 中宗 25년(1531년) 禮安 烏川에서 출생한 김부륜의 字는 惇叔이고 號는 雪月堂이며 본관이 光山이니 兵馬使를 지낸 山南 金富仁의 아우이다.
소년시절부터 형 富仁을 따라 退溪선생 門下에 들어가 薰炙를 받은 그는 16세 때에 글을 읽다가 程明道 선생이 16세에 周濂溪와 더불어 道를 논의하는데 이르러 慨然히 求道의 뜻이 있어 탄식하기를 「吾年이 또한 이 時期라」 하고 責沈詩를 지은 다음 冊을 지고 陶山에 들어가 心經, 太極圖, 義理疑目, 啓蒙傳疑 등에 대해 착실하게 공부하니 퇴계선생이 크게 기뻐하면서 그 立志의 敦篤함을 찬양하였다.
일찍이 司馬試에 급제하여 進士가 되었으나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아 大科에 응하지 않은 채 학문에만 열중하던 설월당이 50代가 지난 후 學行으로 추천되어 同福縣監에 발탁되었을 때에는 孔子廟를 건립하고 봉급을 털어 8백여 권의 書冊을 구입하는 한편, 學則을 제정하여 학문을 권장하니 이 지방에 儒學의 풍습이 크게 일깨워졌다.
그리고 公의 나이 62세 때인 宣祖 25년(1592년) 壬亂이 일어나 倭敵의 침입이 눈앞에 다가오자 家産을 바쳐 義兵 활동을 뒷받침하는 한편으로 慶尙監司에게 글을 올려 왜적을 방어할 計策 三條目을 제안했으며, 이때 奉化縣監이 관직을 버리고 떠나버리자 老齡의 몸으로 다시 봉화현감에 등용되어 亂中에 시달리는 지방민들을 安着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퇴계선생 서거 후 1년 동안 素食을 하면서 心喪을 치루면서 弟子의 예의를 다했던 설월당은 선조 38년(1598년) 68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松巖 權好文
朝鮮 中宗 26년(1593년) 安東에서 출생한 권호문의 字는 章仲이요 號는 松巖이며 본관은 安東이다.
일찍부터 陶山에 들어가 퇴계선생의 薰炙를 받아 百家書를 두루 읽고 詩文에도 조예가 깊었던 송암은 선생으로부터 「儒子의 氣像이 있고, 瀟灑한 山林의 風度가 있다.」 고 칭찬을 받았다.
明宗 15년(1560년) 司馬試에 급제하여 進士가 되었으나 敎官 이상의 관직에는 나가지 않고 향리 淸城山 아래 無閔齋를 지어 그곳에 은거하면서 초연히 학문 연구에만 열중했다.
특히 禮經과 家禮義節 등에 관해 깊이 연구하여 冠婚喪祭의 예절에 수범을 보이기도 했던 그는 만년에 이르러 學行과 德望이 널리 알려져 同門들로부터 官職에 나가기를 여러 차례 추천받았으나 끝내 사양하고 향리를 떠나지 않았다.
당시 官界에서 크게 활약하던 柳西厓 金鶴峯 鄭藥圃 등이 그의 학행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특히 柳西厓는 귀향하는 길에 松巖의 은거지에 들려 「平論一生事 堪作百世師」란 詩를 지어 뛰어난 학행을 찬양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詩歌에 능하여 景幾體歌를 본뜬 「獨樂八曲」과 「閑居十八曲」 등의 시조를 남겨 국문학사에 귀중한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宣祖 20년(1587년) 56세를 일기로 서거한 후 安東 靑城書院에 제향되었으며 『松巖集』을 저서로 남겼다.
文峯 鄭惟一
朝鮮 中宗 27년(1533년) 安東에서 출생한 정유일의 字는 子中이요, 號는 文峯이며 본관은 東萊이니 直提學을 지낸 鄭賜의 玄孫이다.
어릴 때에는 忠定公 權冲齋 門下에서 수학하다가 성장하여서는 陶山으로 들어가 退溪선생의 가르침을 받아서 文翰을 떨치게 되었으며, 20세 때인 明宗 7년에 司馬試에 뽑히고 26세 때에 文科에 올라 藝文館 檢閱, 弘文館 正字와 修撰, 司諫院의 正言, 司憲府의 持平 등 三司의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宦路에 나서게 되었다. 그 후 吏曹正郎, 議政府의 舍人, 弘文館 直提學 등을 역임한 후 모든 관리들의 非違행위를 규찰하고 탄핵하는 사간원의 大司諫에 임용되어 조정의 질서를 바로잡는데 앞장섰다.
文峯이 司諫院에 재직 중일 때 康陵의 喪禮가 끝나고 장차 太廟에 祔祀하려 하는데 당시 領議政 李浚慶이 ‘孝陵을 延恩殿에 奉安하자’고 제안하자 朝廷 大臣 중 아무도 반대하고 나서지 못하였으나 文峯이 홀로 앞장서서 반대하고 나서서 막아냈으며 이에 따라 조정의 典禮가 바로잡혔다고 한다.
이와 같이 곧고 바른 성품을 지녔던 그는 퇴계선생 사후 諡號를 내리도록 임금에게 간곡히 진언하였으며 「退溪先生 言行通述」을 門人 대표로 지었다.
40대 초에 사간원의 최고 간직인 大司諫을 역임한 문봉은 더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는 44세 때인 宣祖 9년에 서거하니 동료 門人들 모두가 안타까워했으며, 관직에 있으면서도 性理學 연구와 저술에 정력을 기울여 『閑中雜錄』과 『關東錄』, 『宋朝名賢錄』 등을 저술하였으나 壬辰倭亂 중에 소실되었다고 呂肅公이 지은 墓碣에 쓰여 있다.
栢潭 具鳳齡
朝鮮 中宗 21년(1526년) 慶北 安東에서 출생한 구봉령의 字는 景瑞이며 號는 栢潭이다.
어릴 때부터 退溪선생 門下에서 수학하여 六經에 밝았던 그는 文章과 行實이 뛰어나다고 선생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21세 때인 明宗 元年(1546년) 司馬試에 합격하여 進士가 되고 明宗 15년 文科에 급제하여 翰林에 들어가면서 宦路에 나섰다.
그 뒤 弘文館 正字에 부임하였다가 文科庭試에 장원오로 뽑혀 修撰에 오르고 湖堂, 議政府 舍人을 거쳐 弘文館 直提學에 올랐으며, 이때 權臣으로 세도가 당당하던 右議政 尹元衡의 죄과를 앞장서서 거론하여 다른 同僚들이 두려워할 정도로 正義派였다고 한다.
뒤이어 承政院 承旨에 임용되었다가 成均館 大司成, 司諫院 大司諫, 弘文館 副提學을 차례로 역임한 후 吏曹參議에 제수되었다.
大司成에 재직 중일 때에는 成均館 儒生들의 學風을 진작시키고 선비들의 風度를 새롭게 하여 朝野의 격찬을 받기도한 栢潭은 그 후 外職에 나가 忠淸道와 全羅道觀察使를 역임하였으며, 다시 內職으로 들어와 司憲府 大司憲, 藝文館 提學을 거쳐 吏曹參判을 지냈다.
그러나 이때 이미 東西分黨에 대한 논의가 거세게 일어나자 超然하게 中立的인 입장을 취해 온 그는 官職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 經籍을 토론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이에 대해 당시 高官職에 있던 同僚 門人 柳西厓는 「其如 江河之潤 山岳之重」이라고 찬양하였다.
文章에도 뛰어났던 栢潭은 선조 19년 享年 61세로 안동에서 서거하였으며 사후 文端公의 諡號가 내리고 安東 周溪書院에 제향되었다.
恥齋 洪仁祐
朝鮮 中宗 10년(1515년) 서울에서 출생한 홍인우의 字는 應吉이요, 號는 恥齋이며 본관이 南陽이니 莊襄公 洪師錫의 五世孫이다.
그는 어려서 花潭 徐敬德 門下에서 수학하였는데 學業에 열중하는 태도에 감탄한 徐花潭은 일찍이 주위 사람들에게 「近來에 學問에 뜻을 둔 사람으로서 將來性이 있는 사람은 洪應吉 한 사람 뿐일 것이라.」 고 칭찬했다고 한다.
이를 實現하듯 20세 弱冠으로 性理學에 관해 깊이 연구하였던 恥齋는 23세 때인 中宗 23年 司馬試에 합격하여 進士가 되고서도 官職에 뜻을 두지 않고 學問에 精進했으며 서울에서 退溪선생 門下를 찾아 弟子의 禮를 갖춘 후 선생께서 陶山으로 귀향하자 安東에 임시로 移居하여 거주하면서 훈학을 받았다.
이때 羅整庵의 困知錄에 실린 人心道心 중의 그릇된 學說을 옳게 배웠고, 趙靜菴의 德行과 遺錄에 대한 자료를 널리 수집하여 行狀을 찬하는데 寄與했다. 蘇齋 盧守愼과 가깝게 친교를 맺어 蘇齋가 朝廷에 있을 때나 乙巳事獄에 몰려 珍島로 流配되었을 때 격려하고 위로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友情을 계속했다.
그러면서도 그 자신만은 조금도 관직에 뜻을 두지 않은 채 性理學에 전념하다가 明宗 10年에 서거하니 享年이 40세였다. 死後 그 아들 唐興君 進이 귀하게 되어 領議政의 증직을 받고 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驪州 沂川書院에 配享되었다.
鶴峯 金誠一
김성일의 字는 士純이고 號는 鶴峯이며, 본관이 義城이니 靑溪公 金璡의 아들이다.
조선 中宗 32년(1538년) 安東府 臨河縣 川前에서 출생하여 6세 때 이미 孝經을 배우면서 학문에 뜻을 두었던 학봉은 소년기에 이르면서 더욱 독서에 열중하였으며, 19세 때부터 아우인 南嶽(金復一)과 함께 退溪선생 門下에 들어가 깊이 있는 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27세 때인 明宗 19년 鄕試를 거쳐서 進士試에 二等으로 합격하였으며 그 후 陶山에 머물면서 학문 연구에 정진하여 29세 때에 퇴계선생으로부터 道學淵源의 正脈을 서술한 屛銘을 받는 영광을 차지하였고, 31세 때인 宣祖 원년 文科에 급제하여 承文院 副正字에 기용되면서 宦路에 나서게 되었다.
天性이 英特하고 行實이 高邁하여 퇴계선생의 寵愛를 받고 주위 동료들의 羨望을 받았던 학봉은 학문에 專力하려던 뜻을 바꾸어 文科에 응시하고 관직에 나선 이후 32세에 弘文館 正字에 오르고, 33세에는 藝文館 檢閱 겸 春秋館 記注官, 34세에 藝文館 待敎, 36세에 成均館 典籍, 刑曹佐郎, 兵曹佐郎, 司諫院 正言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으며 正言에 재임 중일 때에는 朝廷에 있는 여러 동료 문인들과 함께 퇴계선생에게 諡號를 내리도록 임금에게 간청하였다.
이 무렵 魯山君(端宗) 墓封植과 死六臣의 復爵을 청원하는 上疏文을 처음으로 올려 朝廷 大臣들의 관심을 모으게 한 학봉은 弘文館 修撰을 거쳐 吏曹正郎에 오른 40세 때에는 宗系改正奏請 書狀官으로 뽑혀 正使 尹斗壽와 함께 北京을 다녀왔으며, 뒤이어 弘文館 校理, 司憲府 掌令, 議政府 舍人, 司諫院 司諫, 咸鏡道 및 黃海道 巡撫御史, 羅州牧使 등을 차례로 역임한 바 있으나, 49세 때에는 社稷壇이 失火되자 自劾하는 狀啓를 올리고 스스로 官職에서 물러났다.
이때 川前에서 이사한 西後 金溪에 머물면서 退溪先生文集을 編次 校正하고 『聖學十圖』, 『朱子書節要』, 『自省錄』, 등 퇴계선생 遺書를 刊行하였으며 『奉先雜儀』, 『吉凶諸儀』 등 禮書를 저술하는 한편 靑城山 중턱에 晩年에 은거할 石門精舍를 신축하였다.
51세 때에 다시 宗簿寺正의 벼슬을 제수 받아 朝廷에 들어간 후 奉常寺正, 禮賓寺正, 京畿推刷敬差官 등을 역임한 다음해인 선조 22년(1589년) 日本通信副使로 뽑혀 正使 黃允吉, 書狀官 許箴과 함께 渡日하였다가 1년 2개월 후에 돌아왔다.
몇 달 앞서 귀국한 黃正使 復命 내용과 뒤에 귀국한 학봉의 복명 내용이 큰 차이가 있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된 바도 있지만 이때 일본 사신으로서의 눈부신 활약은 海槎錄에 수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역사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귀국 후 通政으로 승진되어 成均館 大司成을 비롯 承文院 副提調, 弘文館 副提學, 承政院 副承旨, 僉知中樞府事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으며 55세 때인 선조 25년에는 刑曹參議를 거친 다음 慶尙右道兵馬節度使로 발탁되었으나 불행스럽게도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되자 한 때나마 倭情誤報의 죄로 拿命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兵馬節度使로 부임한 후 敵將을 무찌른 공적에 관한 狀啓가 올라가고 王世子와 左議政 柳西厓의 극력한 변호로 처벌을 면하게 되었으며, 다시 慶尙道招諭使에 임명되어 一死報國의 충절을 다 바치게 되었다.
拿命에서 풀려나 招諭使로 임명된 鶴峯은 咸陽에 도착하여 친히 招諭文을 작성하여 도내 郡邑마다 布告하는 한편 幕下에 모여든 선비 중에서 義兵大將과 招募使를 삼았으니 居昌의 金沔, 陜川의 鄭仁弘, 玄風의 郭再祐 등이 義兵을 일으켜 倭敵과 싸워 큰 武功을 세운 대표적이 例인 것이다.
그 후 晋州를 本營으로 하고 각 고을의 義兵을 규합하여 왜적에게 빼앗긴 泗川, 鎭安, 固城 등지를 차례로 탈환하는 등 무공을 세우자 左道觀察使에 임명되어 任地를 옮기게 되었으나 右道內 士民들의 간곡한 청원에 의하여 이내 곧 右道觀察使로 전임되어 晋州 本營에 머물면서 抗戰을 독려하게 되었다.
이처럼 壬辰倭亂 초기 진주를 중심으로 南海岸 지방에서 一死報國의 큰 공을 세운 鶴峯이 宣祖 26년(1593년) 4월 29일 진주 客舍에서 病患으로 卒하니 향년이 56세였다.
壬亂이 평정되고 서거 후 13년 되는 해인 宣祖 38년 戰亂 때 쌓은 공적을 인정하여 宣武原從功臣 一等에 훈록하고 吏曹參判의 증직을 내렸으며, 그 후 肅宗 때에는 다시 吏曹判書의 증직과 文忠公의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安東의 臨川書院을 비롯하여 泗濱書院과 虎溪書院, 英陽의 英山書院, 羅州의 大谷書院, 河東의 永溪書院, 靑松의 松鶴書院, 晋州의 慶林書院, 義城의 永溪書院 등에 入享되었다.
謙庵 柳雲龍
朝鮮 中宗 33년(1539년) 安東府 豐山縣 河回에서 출생한 유운룡의 자는 應見이고, 호는 謙庵이며 본관이 豊山이니 일찍이 觀察使를 지낸 柳仲郢의 아들이다.
어릴 때 집안에서 공부할 때부터 재질이 뛰어나고 총명했던 겸암은 소년시절 아우 西厓와 함께 陶山으로 들어가 퇴계선생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선생의 총애를 받는 한편 同門들의 선망을 받아 文翰이 뛰어났으며 뒷날 향리에 謙庵精舍를 세웠을 때 퇴계선생의 친필 書額을 받고 祝詩를 얻기도 했다.
西厓와는 달리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아 科擧에는 일체 응시하지 않은 채 學問과 家事에만 열중하던 겸암은 34세 때인 선조 5년 學行의 뛰어남과 家門의 음덕에 의하여 仁同縣監에 발탁됨으로써 관직에 나가게 되었다.
仁同縣監에 재임 중 고려 충신 冶隱 吉再선생의 묘역을 보수하고 위패를 봉안할 吳山書院 건립의 기초를 닦은 그는 관내의 土田, 民戶, 稅貢, 徭役을 비롯하여 官穀의 搬出入에 이르기까지 모두 계획서에 의하여 均等하게 시행함으로써 수년 내 읍민들의 불평을 없애고 칭찬을 받게 되었으며 이 사실이 監司에게 알려지자 道內 다른 고을에도 적용하도록 종용을 받았으나 監司가 전임됨에 따라 他邑에는 시행하지 못하였다.
그 후 몇 개 고을을 거쳐서 壬辰倭亂이 일어나던 무렵에는 豐基郡守를 역임하면서 도적의 무리를 물리치고 백성들이 生業에 전념할 수 있도록 선정을 베푸는 한편 戰亂中임에도 貢物을 마련하여 朝廷에 보내는 등 큰 공을 세웠으며 그 공적으로 正三品 通政으로 승진되어 原州牧使로 榮轉하게 되었다.
이때 겸암은 疏를 올려 말하기를 「竹嶺은 湖嶺의 사이에 당하여 百二重關의 險함이 있사오니 마땅히 옛날대로 順興府를 다시 두어 豊基까지 예속시키고 丹陽, 永春, 堤川, 淸風 등 네 고을을 합쳐서 한 鎭으로 다스리게 하십시오.」 하였다고 柳西厓가 지은 墓誌에 적혀 있다.
壬亂 때 세운 공으로 光國原從勳의 훈작을 받았으며 선조 34년 서거하니 향년이 63세였다. 사후 吏曹判書의 증직과 文敬公의 諡號가 내리도록 아우인 西厓가 禮曹에 청하였으나 吏曹參判의 증직이 내리고 豊基 愚谷書院과 豊山 花川書院에 향사되었다.
東岡 金宇顒
朝鮮 宣祖 때의 文臣이요, 學者인 김우옹의 자는 肅夫이고 호는 東岡이며 본관이 義城이니 府使 金希參의 아들이다.
中宗 34년 星州에서 출생하여 어릴 때에는 鄭仁弘과 함께 南冥 曹植 門下에서 수학하다가 청년시절부터 鄭寒岡과 같이 退溪 문하에 들어와 훈자를 받게 되었으며 18세 때인 明宗 12년 司馬試에 합격하여 進士가 되고 明宗 23년 文科에 급제하여 宦路에 나서게 되었다.
弘文館 正字에 초임한 후 成均館 典籍을 비롯하여 校理, 直提學, 大司成, 副提學, 大司諫, 監司, 大司憲 등 內外의 여려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나중에는 吏曹參判에 올랐다.
宣祖 즉위 초기인 正字 재임 시절에 이미 임금의 명령을 받아 聖學六箴을 지어 올리고, 直提學 시절에는 神德王后의 祔廟 문제가 논란될 때 正論을 펴기도 하였고, 大司諫이 되었을 때에는 東西分黨의 해소를 위해 노력하기도 했지만 親分上으로 東人의 거두인 金孝元, 柳成龍 등과 가까웠기 때문에 東人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宣祖 22년 己丑獄事 때에는 모반자인 鄭汝立과 가깝다는 이유로 연루되어 파직과 동시에 함경도 會寧으로 귀양가게 되어 流配地에서 『總綱目』 15권을 저술하였으며 4년 후인 선조 25년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나 復官되었다.
이때 임금이 蒙塵 중인 義州로 가서 明將 袁黃의 接伴使를 겸하여 활약하였으며 戰亂이 평정된 후 大司憲을 거쳐 漢城副尹에 제수되었고 이때 西人들의 모함으로 곤경에 빠진 柳西厓를 위한 抗疏文을 올려 구제해 주기도 했다.
그 후 提學을 거쳐 吏曹參判에 올랐으나 관직에서 물러난 후 젊은 시절 曹南冥 門下에서 함께 공부한 同鄕의 鄭仁弘이 退溪선생을 공박하고 南人을 질투하는 처사가 싫어서 星州로 돌아가지 않고 淸州 땅 鼎坐山 아래 터를 잡아 은거하다가 서거했다고 擇里志 慶尙道篇에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正義感이 강했던 東岡은 선조 36년 우거지에서 서거하니 향년이 64세였다. 『東岡集』과 『經筵講義』, 『續綱目』 등의 저서를 남긴 그에게 吏曹判書의 증직과 文貞公의 시호가 내렸으며 星州 晴川書院과 淸州 鳳溪書院, 會寧 鄕祠宇에 제향되었다.
艮齋 李德弘
朝鮮 中宗 35년(1541) 榮州 九龍洞 外家에서 출생한 이덕홍의 자는 宏仲이고, 호는 艮齋이며 본관이 永川이니 孝節公 聾巖 李賢輔 선생의 從孫이자 興海敎授 李忠樑의 아들이다.
어려서 惺齋 琴蘭秀 門下에서 글공부를 하다가 15세가 넘은 뒤에 惺齋를 따라 퇴계선생에게 훈자를 받게 된 艮齋는 학문에 몰두하여 性理學은 물론 兵略, 算學, 曆法 등에도 능통하였으며 과거에는 응시하지 않았으나 뒷날 學行으로 추천되어 參奉과 縣監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형인 坤齋 命弘, 蘆雲 福弘과 함께 陶山書堂에서 수학하여 여러 兄弟 從班 중 학문이 뛰어났던 艮齋는 1570년 30세에 이미 향리 伊洞에 오溪精舍를 창건하고 여기서 渾天儀와 璿璣玉衡을 제작하여 퇴계선생에게 올렸다. 이해 선생이 易簀하기에 앞서 子姪과 수많은 弟子 중 書籍을 관리하라는 遺命을 받으리만큼 선생의 총애를 받았던 간재는 이후 3년 동안 素食으로 心喪의 禮를 받듦으로써 弟子의 도리를 다하였다.
宣祖 초기 朝廷에서 學德이 뛰어난 在野 名儒 9人을 천거할 때 鄭寒岡이 제1위이고, 公이 4위로 뽑혔으며 이에 따라 38세 때인 선조 11년 學行으로 集慶殿 參奉에 제수되면서 관직에 나가게 되었다.
그 후 昌陵과 顯陵의 參奉, 豊儲倉 奉事, 宗廟⦁司甕署의 直長, 翊衛司 右副卒을 거쳐 永春縣監에 이르렀으며 29세 때에 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에는 王世子宮의 官員으로 평안도 成川까지 王世子를 호종하였다.
壬亂중인 선조 29년 56세로 서거하였으며 壬亂 초에 세운 功績으로 사후 衛聖功臣 一等에 錄勳되고 吏曹參判의 증직이 추증되었으며 榮州 오溪書院에 제향되었다.
蒙齋 李安道
文純公 李退溪선생의 長孫인 公의 자는 逢原이며 호는 蒙齋이다. 中宗 35년(1541년) 陶山 上溪에서 출생한 蒙齋는 어릴 적부터 祖父인 退溪선생에게 薰陶를 받아 일찍이 學禮를 성취하여 선생 門下에 찾아드는 전국의 선비들과 親交를 갖게 되었으며 21세 때인 明宗 16년 司馬試에 합격하여 進士가 되었으나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했다.
天性이 醇厚하고 仁慈하여 지위의 高下를 막론하고 陶山을 드나드는 많은 門人들에게 친절하고 겸손하게 응대하여 신뢰와 존경을 받았으며 先生이 易簀할 무렵에는 부친 僉正公(李寯)이 奉化縣監에 재임하고 있었던 관계로 선생 곁에서 가사를 돌보면서 여러 門人들과 가깝게 지냈다.
후일 學行으로 천거되어 參奉이 되었다가 軍器寺 直長을 역임하였다.
선생 易簀 후 여러 문인들과 함께 선생의 文集抄錄과 年譜를 편집 발간하고 여러 子姪孫 중에서 言行錄을 남긴 바 있으나 43세 때에 親喪을 당하여 居喪하던 중 44세로 廬所에서 서거하니 이때가 宣祖 17년 8월이었다.
서거 후 禮安 東溪祠에 入享되었다.
西厓 柳成龍
朝鮮 宣祖 때의 文臣으로서 壬辰倭亂을 극복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政治家요, 學者인 유성룡의 자는 而見이고 호는 西厓이며 본관이 豐山이니 觀察使를 지낸 柳仲郢의 아들이다.
中宗 36년(1542년) 義城 沙村 外家에서 출생하여 여섯 살 때에 『大學』을 배우고 8세에 이미 『孟子』와 『論語』를 읽고 16세 때에 鄕試에 합격하리만큼 재능이 뛰어났던 서애는 21세 때부터 退溪선생 문하에 들어가 심오한 학문을 닦음으로써 뒷날 儒學者로, 또 政治家로 大成하게 되었다.
소년시절에 成人과 같은 行動을 하여 주위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고 처음으로 陶山書堂을 찾아 갔을 때 퇴계선생으로부터 “이 아이는 하늘이 낳은 人才인바 반드시 大儒를 이루리라.”고 칭찬을 받았던 서애는 이후 『心經』과 『近思錄』 등을 배워 性理學에 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하게 되었다.
23세에 司馬兩試에 합격하여 生員과 進士가 되고 25세 때인 明宗 21년 文科에 급제하여 承文院權知 副正字에 피임되면서 宦路에 나서게 되어 26세에 藝文館 檢閱 및 待敎에 올랐다가 28세에는 成均館 田籍과 工曹佐郎을 역임한 후 明나라에 파견하는 聖節使 書狀官으로 선발되어 明京을 다녀왔다.
이 때 일행이 明京에 들어가 宣治門 밖에 머물러 있을 때 그곳 太學生 수 백명이 몰려오자 서애는 그들에게 “요즈음 明朝의 名儒 중에서 누구를 道學의 師表로 삼느냐?”고 묻자 “王陽明과 陳白沙로 으뜸을 삼는다.”는 대답이었으며 이에 서애는 “白沙는 道學에 대한 見識이 精하지 못하고 陽明의 學은 오로지 禪學에서 얼굴을 바꾼 것인 만큼 薛文淸으로 師表를 삼는 것이 옳을 것이요.”라고 하여 明士 吳京으로 하여금 탄복하게 했다고 한다.
그 뒤 吳京이 玉河關까지 찾아와 호의를 베풀게 되자 퇴계선생의 「聖學十圖」를 내어 보였으며 귀국한 후 明京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선생에게 보고하자 퇴계는 다음과 같은 답서를 보내 서애의 활약을 칭찬하였다.
“陸氏의 禪學이 천하를 懷讓함이 이와 같으니, 浩歎하여 마지못할 일이다. 그러나 燕京에 들어간 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人士를 만나 그러한 말을 한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대가 能히 수백의 諸生을 만나 이러한 正論을 내어 그 昏迷함을 깨우쳐 주었으니 이는 쉽게 얻지 못할 일이로다.”
29세에 明京에서 돌아와 弘文館 副修撰⦁修撰을 거쳐 司諫院 正言과 吏曹佐郎에 올랐으며 이해 겨울 퇴계선생의 訃書가 이르자 在京 여러 門人들과 함께 鶴峯의 館所에 모여 會哭하였고 다음해 봄 陶山으로 내려와 會葬하였다.
그 뒤 弘文館 校理를 비롯하여 吏曹正郎, 司諫院 獻納, 議政府 檢詳⦁舍人, 弘文館 應敎⦁典翰, 司憲府 掌令, 軍器寺正, 弘文館 直提學⦁副提學, 承政院 同副承旨, 吏曹參議, 尙州牧使, 司諫院 大司諫, 司憲府 大司憲, 成均館 大司成, 承政院 都承旨, 咸鏡道觀察使, 慶尙道觀察使 등을 차례대로 역임한 후 43세 때인 宣祖 17년에는 禮曹判書에 올랐다.
46세에 刑曹判書에 전임되었다가 成均館과 弘文館 大提學, 兵曹判書, 知中樞府事, 禮曹判書 등 요직을 역임한 서애는 이 기간 중 학문에도 진력하여 『大學衍義』를 초하고 「備邊五策」을 지어 올리는 한편 「皇華集序」와 「圃隱年譜」를 撰進하고 『退溪先生文集』을 編次하였으며 軍威의 南溪書堂과 河回 北崖의 玉淵書堂을 이룩하여 학문을 장려하기도 했다.
선조 23년 49세로 議政府 右議政에 오르고 宗系改正의 공적으로 光國功臣 三等에 錄勳되고 豐原府院君에 봉군되었으며 그 다음해에는 吏曹判書를 겸직하는 특전을 받았다가 곧 左議政에 오르고 뒤따라 임금의 특명으로 弘文館 大提學을 겸임하게 되니 다른 대신들은 한 번 오르기도 어려운 文衡錄에 이례적으로 두 번째 오른 셈이었다.
左議政에 오른 후 당시 日本에 使臣으로 다녀 온 黃允吉을 통하여 일본이 明나라를 쳐들어 갈 것 같더라는 倭의 情勢를 보고받은 바 있는 서애는 領議政 李山海의 반대를 무릅쓰고 명나라에 통보해 주어 明帝의 환심을 얻었으며 이와 동시에 備邊司에서 才將을 뽑을 때 刑曹正郎 權慄을 義州牧使에 천거하고 井邑縣監 李舜臣을 全羅左道水使에 발탁되게 함으로써 그 다음해에 일어난 임진왜란에 대처케 한 것은 先見之明이 있는 일대 영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51세 때인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倭兵이 쳐들어오자 左議政으로서 다시 兵曹判書를 겸직하게 된 서애는 李鎰과 申砬을 巡邊使로 삼고 成應吉, 趙儆으로 左右防禦使로 기용하여 倭敵의 北侵을 막게 하였으나 敗戰의 소식이 전해지자 친히 都體察使가 되어 諸將을 통솔하게 되었으며 이어 서북쪽으로 蒙塵하는 임금으로부터 서울을 지키라는 命을 받아 大任에 나섰다.
이때 都承旨 李恒福이 임금께 아뢰기를 “서쪽으로 가서 물 하나를 건너면 곧 中國 땅인 만큼 의당히 酬酌, 應變의 일이 있을 터인바 이제 朝臣 중에서 明敏하고 練達하여 古誼를 잘 알고 愬命에 능한 이는 오직 柳成龍 한사람뿐인 만큼 따라가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여 임금의 行次에 따르게 되었으며 그해 5월 여러 大臣들과 함께 臨津江을 건널 제 宣祖는 西厓에게 “만일 뒷날 國歌가 中興한다면 의당히 卿의 힘을 입을 것이요.”라고 하였다.
그 후 東坡驛에 이르렀을 때 선조는 여러 大臣들이 모인 자리에서 가슴을 두드리면서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나는 장차 어디로 가야할 것이냐?”고 탄식할 제 都承旨 李恒福이 아뢰기를 “義州로 갔다가 八路가 모두 陷落될 경우에는 明朝에 呼厓하셔야 합니다.”하였으며 이에 서애는 “不可합니다. 大駕가 東土에서 한 발자국만 떠난다 해도 朝鮮은 우리의 所有가 아닐 것입니다.”라고 不可論을 아뢰는 한편 李恒福과 여러 차례 論辨을 거듭하면서 “우리의 諸道가 예와 다름이 없을 뿐 아니라, 東北의 兵馬가 온전하고, 湖南의 義兵이 응당 不日內에 蜂起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찌 함부로 이런 일을 논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그때서야 李都承旨도 그 뜻을 깨닫고 반론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 서애는 吏曹判書 李誠中에게 말하기를 “만일 李恒福을 만나거든 나의 뜻을 전해주게, 그는 어찌 가볍게 棄國論을 主唱한단 말인가?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항복이 비록 길가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이는 婦人 侍女, 內侍의 忠誠에 불과한 것이야. 國土를 버린다는 말이 한번 퍼뜨려지면 瓦解되는 人心을 누가 능히 收拾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 뜻을 명백히 알지 못하고 있던 이항복은 급기야 寧邊에 이르렀을 때 流言蜚語가 크게 전파되어 關西의 인심을 수습하기 어려운 것을 目擊한 연후에야 비로소 서애의 선견지명에 탄복하고서 뒷날 사과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런 일이 있은 후 大駕가 開城에 이르렀을 때 領議政 李山海가 파직되자 領議政에 陞進되었으나 申磼 등의 무고에 의하여 곧 罷職 당하였으며 平壤에 이르러 李山海에게 流配令이 내려질 때 西厓에게도 問責說이 있었다. 이때 李恒福, 洪麟祥 등의 力諫으로 禍를 입지 않고 다시 府院君에 복군되어 名將 林世祿을 접대하는 한편 평양을 고수할 것을 啓請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의주에 이르러 북방에 유배 중인 曺好益을 사면케 하여 江東지방에서 義兵을 일으키게 하고 뒤이어 平安道都體察使에 발탁되어 明나라 提督 李如松이 4만 원병을 이끌고 定州에 도착했을 때 평양 지도를 전해주면서 평양 탈환 등 남하 진로를 지시하였으며 다음해에는 湖西 湖南 嶺南의 三道 都體察使가 되어 李如松 提督과 李舜臣 權慄장군 등이 전개하고 있는 陸海戰을 독려하여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한편으로 軍事訓練 실시와 訓鍊都監 설치 등을 건의한 서애는 그해 10월 임금을 모시고 還都한 후 다시 領議政에 올라 倭敵을 내몰고 戰亂을 극복하는데 앞장섰다.
宣祖 27년 초에는 글을 올려서 軍士를 訓練시킴에 있어 勤慢을 조사하여 賞罰을 밝히게 하고 湖西지방의 寺社와 位田 등을 訓鍊都監에 귀속시켜 軍糧에 보충하게 하였으며 鳥嶺에 屯田을 설치하여 戰時에 대비케 하는 한편 9월에는 人才를 널리 등용케 하는 「請廣取人才啓」를 올려 시행케 하고 또 「戰守機宜十條」를 올려 시행케 했다.
54세 때인 선조 28년에는 다시 京畿⦁黃海⦁平安⦁咸鏡道 등 4道의 都體察使를 겸임하여 北方部의 抗戰을 督察하는 등 戰亂의 뒷수습에 盡力하였으며 忠武公 李舜臣을 극력 변호한데 대한 무고가 있자 56세 때에는 여러 차례 官職을 사임하려 한 바도 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음해인 선조 31년 드디어 官職에서 罷職되고 府院君에 批下되었고 그해 12월에는 鄭仁弘의 무고에 의해 일체의 관직이 削奪된 바 있으나 2년 후인 59세 때에 오해가 풀려 다시 職牒을 돌려받게 되었다.
57세 때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곧바로 鄕里인 安東府 內 河回로 귀향하여 학문에 열중하면서 退溪先生年譜를 撰하고 뒤이어 『愼終錄』 『永慕錄』 『喪禮考證』 등을 저술하였으며 63세 때인 선조 37년에는 다시 豐原府院君에 封해지고 扈從勳 二等과 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의 號를 받았다.
64세에는 「知行說」과 「知行合一說」을 써서 王守仁의 說을 論駁하였으며 『帝王紀年錄』을 찬술하였고 또 上疏文을 올려 奉朝賀의 祿을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宣祖 40년 5월 6일 서거하니 향년이 66세였다. 壬辰倭亂時의 亂中日記인 『懲毖錄』과 『亂後雜錄』 『喪禮考證』 등 많은 저서를 남긴 서애는 사후 道德博聞과 危身奉上의 뜻이 담긴 文忠公의 諡號를 받았으며 安東의 屛山書院을 비롯하여 虎溪書院, 軍威의 南溪書院, 尙州의 道南書院, 龍宮의 三江書院, 義城의 氷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秋淵 禹性傳
朝鮮 中宗 36년(1542년) 서울에서 출생한 우성전의 자는 景善이고 호는 秋淵이며 본관이 丹陽이니 麗末의 碩學 易東 禹倬 선생의 후손이다.
일찍부터 陶山으로 내려가 퇴계선생의 훈자를 받은 그는 이 지방 출신 門人인 鶴峯 金誠一, 鶴川 李逢春, 芝軒 鄭士誠 등과 가깝게 지냈으며 學問에 있어서는 易象과 禮學에 관해서 조예가 깊었다.
宣祖 즉위 초기에 文科에 급제하여 弘文館, 司諫院 등 三司의 여러 관직을 역임한 다음 선조 15년 應敎가 되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날 무렵에는 成均館 大司成에 올랐다.
성격이 獨尊的이어서 眼高一世라는 평을 받았던 秋淵은 선조 20년을 전후하여 東西分黨이 이우어질 때에는 金孝元, 柳成龍 등과 함께 東人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90 老母의 만류를 무릅쓰고 義兵을 일으켜 서해안 江華로 가서 義兵將 金千鎰과 함께 왜적을 대항하여 抗戰하다가 다음해 富平 근방에서 病死하니 향년이 52세였다.
『癸甲日錄』, 『喪禮問答』 등의 저서와 「退溪先生言行錄」을 후세에 남긴 그는 사후 文康公의 시호를 받았다.

언행록 言行錄

 

先生이 일찍이 月寺에 있을 때 소어(풀막 소魚 : 밴댕이)를 보내준 사람이 있었다. 先生은 이웃 노인에게 나누어 보낸 뒤에 비로소 맛을 보았다. (이덕홍)
先生月寺有풀막 소魚者分送老乃之(李德弘)

자제들이 內醫院에서 약을 구하였는데, 先生은 「옳지 않다」하였다. 내가 묻기를 「이것은 다른 물건과 는 다른데 무엇이 해롭습니까?」하였더니, 先生은 「義로써 온당하지 않은 일이니 결코 하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이국필)
子弟

을축년(1565년) 겨울에 尹復이 안동부사가 되어 찾아왔을 때 禮單을 드렸는데 하직하고 난 뒤에 보니, 그것은 노루고기였다. 제삿날에 고기를 받는 것이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12월 24일(成宗 의忌日)에 趙士敬이 술과 고기를 가져왔으나 술은 받고 고기는 받지 않았다. (우성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