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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현들의 학문과 사상을 연구 개발하는사단법인 퇴계학 부산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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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

연보 - 年, 內容을 나타내는 표입니다.
內 容
1501년 (연산 7년) 11월 25일 辛酉 辰時에 선생께서 禮安縣 溫溪 마을 집에서 나셨다.
1502년 (선생 2세) 6월 13일 아버지 贊成公께서 돌아가셨다. 이때의 나이 40세였다.
1503년 (선생 3세)
1504년 (선생 4세)
1505년 (선생 5세)
 
1506년 (선생 6세) 중종 원년 丙寅年에 선생께서는 처음으로 글 읽기를 시작하였다. 이웃에 있는 노인에게 『千字文』을 배웠다. 아침이면 반드시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그 노인 집으로 가서 울타리 밖에서 전날 배운 것을 두어 번 외운 다음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마치 엄한 스승을 대하듯 그 노인 앞에 공손히 俯伏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小學』을 읽지 않았는데도 이 때 이미 灑掃하는 절도와 孝弟의 도리를 알았다.
1507년 (선생 7세) 책을 좋아하였고, 어른들의 말씀을 들으면 잊지 않았다. 이때 숙부 堣가 晉州 牧使로 있었다. 셋째 형 漪와 넷째 형 瀣가 숙부를 따라가 晉州의 月牙山 靑谷寺(현 진주시 금산면 갈전리)에서 공부하였다. 두 형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한스러워 이따금 말하곤 하자, 어머니가 “자식 된 사람은 마땅히 글을 읽어 학업을 성취해야 한다. 네 형들은 이 때문에 간 것이니, 너무 그리워할 필요는 없느니라.”하였다. 이 말을 들은 뒤부터 더욱 학업에 열중하였다.
1508년 (선생 8세) 둘째 형 河가 칼에 손을 베였는데 退溪가 붙들고 울자, 어머니가 “정작 손을 다친 형은 울지 않는데 너는 왜 우느냐?” 하니, “형님은 비록 울지는 않지만, 피가 저렇게 흐르고 있으니 어찌 아프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1509년 (선생 9세) 이 무렵부터 이미 道에 뜻을 두었다.
1510년 (선생 10세)  
1511년 (선생 11세) 兜溪의 盤石(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兜溪精舍 앞 냇가에 있음)에서 놀았다. 이때 江原 監司였던 숙부 堣가 휴가를 받고 고향에 돌아왔다가 子姪輩들을 데리고 이 盤石에서 놀았는데, 그때 따라가서 놀았다. 이로부터 37년이 경과한 丁未年(1547년)3월에 退溪는 이 반석에서 형님 및 조카들과 모여서 지난 일을 追念하였다. 그리고 이 반석을 숙부 堣가 이 반석에서 놀 때 지은 「率兒輩遊兜溪盤石」 詩 중의 말을 취하여 ‘淸吟石’이라고 命名하고, 그렇게 명명한 연유를 밝힌 짤막한 序文을 붙인 詩 二首[「淸吟石」 (幷序)]를 지었다.
1512년 (선생 12세) 넷째 형 瀣와 함께 숙부 堣에게서 『論語』를 배웠다. 배우는 처음에 「學而篇」의 “배우는 사람은 집에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공손해야 한다.”는 대목에 이르자 두려운 듯 스스로 경계하여 “사람의 도리는 마땅히 이래야 할 것이나.”하였다. 堣는 학습 과정을 엄격하게 세워서 가르쳤고, 退溪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고 열심히 배웠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배우면 이를 반드시 다시 익혀서 1권을 마치면 1권을 완전히 외우고, 2권을 마치면 완전히 외웠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오래 되자 차츰 처음 배울 때와는 달라져서, 3~4권을 읽을 때는 간혹 스스로 이해되는 것이 있었다. 「子張篇」을 읽을 때 “일의 옳은 것이 理입니까? 하고 묻자, 堣는 그렇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마음속의 의문이 풀리면서 터득한 것이 있은 듯하였다고 한다. 특히 堣는 退溪의 학습 과정을 살펴보면서 매양 이 아이가 우리 집안을 유지할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후일 退溪는 자신이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게 된 것은 堣의 가르침과 독려 덕분이라고 하였다.
1513년 (선생 13세) 『論語』를 다 배웠다. 지난해인 壬申年(1512년)부터 숙부 堣에게서 배우기 시작하여 이때에야 마친 것이다.
1514년 (선생 14세) 글 읽기를 좋아하여 비록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도 반드시 벽을 향해 앉아서 침잠 완색하였다. 그리고 陶潛(字 淵明, 元亮, 號 五柳先生)의 詩를 좋아하였고, 또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1515년 (선생 15세) 숙부 堣가 淸凉山을 유람하는데 여러 형들과 함께 따라갔다가 그 산 절에 머물면서 글을 읽었다. 退溪가 청량산에 오른 것은 이때가 처음인데, 이 후로는 수시로 책을 지고 이 산에 와서 글을 읽었다.
安東 府使로 재직하고 있던 숙부 堣를 따라 安東에 갔다. 이때 安東府에는 「漁父詞」를 잘 부르는 老妓가 있었는데, 堣는 때로 그녀를 불러다가 「漁父詞」를 부르게 하여 祖母 英陽 金氏를 기쁘게 해 드리곤 하였다. 退溪는 이때「漁父詞」라는 노래를 처음 듣고, 마음속으로 좋아서 그 歌詞의 대략을 기록해 두었다고 한다. 안동에 가 있는 동안 친구들과 사냥을 하다가 술에 취하여 말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다. 술에서 깨어난 뒤 통렬히 질책하고는 경계하고 반성하는 마음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시냇물에 살고 있는 가재를 두고 詩(「石蟹」)를 지었다. 이 시는 현재 전하는 退溪의 시로는 최초의 작품이다.
1516년 (선생 16세) 안동 鳳停寺(현 안동시 서후면 태장2리 천등산에 있음)에서 從弟 壽苓(숙부 堣의 맏아들)과 함께 글을 읽었다. 이때 貢生 權敏義와 姜翰이 따라왔다. 이로부터 50년이 경과한 丙寅年(1566년) 이곳에 다시 들르게 되었을 때, 옛날 從弟 壽苓과 權敏義 및 姜翰 등과 함께 놀던 봉정사 입구의 落水臺를 鳴玉臺라 改名하고, 詩(「鳴玉臺」)를 지어서 지난 일을 추억하였다.
1517년 (선생 17세) 金安國(자 國卿, 호 慕齋)을 만났다. 김안국은 당시 慶尙道 觀察使로 溫溪를 지나다가 불러서, 넷째 형 瀣와 함께 가서 만났다. 김안국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 한편, 책과 식량을 주어 山寺에서 글을 읽게 하였다.
11월 8일, 숙부 堣가 安東 府使로 재임하던 중에 병으로 별세하였다. 運柩하여 禮安縣 溫溪里 樹谷 先塋 동편에 장사지냈다.
1518년 (선생 18세) 安東鄕校에 遊學하였다. 이때 李賢輔(字 棐仲, 號 聾巖)가 안동 부사로 있으면서 鄕校에다 儒學하는 선비를 크게 불러 모아 학문을 장려하고 인재를 길렀다. 그래서 가서 배웠다.
1519년 (선생 19세) 中宗이 成均館의 文廟에서 謁聖할 적에 趙光祖(字 孝直, 號 靜菴)를 보았다. 후일 회상하기를, 훌륭한 儀表를 통해 그 인품을 헤아려 알 수 있었다고 하였다.
文科 別擧 初試에 응시하였다. 이 시험에 응시하러 서울로 가는 도중 주막에 묵게 되었는데, 하인이 남의 밭에서 푸를 콩을 따다가 밥에 놓아 올리자 물리치고 먹지 않았다.
『性理大全』 首尾 2卷(卷1 「太極圖說」과 卷70 「詩」를 얻어서 읽었다. 후일 회상하기를,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즐겁고 눈이 열려, 오래 읽을수록 점점 그 의미를 알게 되어 마치 그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터득한 것 같았다고 하였다.
1520년 (선생 20세) 서울에 갔다 왔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豊基를 지나다가 族叔 允貞(?)을 만나 집안 선조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退溪의 6代祖 碩(?)은 원래 아전으로 司馬試에 합격하여 吏役을 면하게 되었는데, 그 아들인 子脩와 子芳(?) 대에 四馬 白牌를 분실하여 다시 吏役으로 돌아갈 처지에 놓였으나, 子脩는 松安君으로 封君되어 吏役을 면하게 되었고, 子芳만 다시 吏役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뒷날 이 사실을 고증한 글[「松安君諱(子脩)封爵傳疑」]를 지었다.
『周易』을 읽었다. 그 의미를 강구하느라 거의 침식을 잊다시피 한 결과, 이때부터 항상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병에 걸리게 되었다.
1521년 (선생 21세) 金海 許氏(1501-1527)에게 장가를 들었다. 김해 허씨는 進士 許瓚(字 叔獻, 號 黙齋, 1481-1535)의 딸이다. 남편 공경하기를 손님처럼 하여 물건을 건넬 때는 반드시 소반에 담아서 공손히 올렸다. 거처도 달리하여 家人들은 서로 친애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부부간의 금슬이 좋지 않은 것으로 의심하기도 했으나, 나중에서야 부부간의 정이 깊은 것을 알았다고 한다. 자신의 집은 가난하고 夫人의 친정은 부유하였지만 처가살이를 하지 않고, 가족만 처가에 맡긴 채 고향에서 살면서 때로 왕래하였다. 그리고 처가에 살찐 말이 있었지만 그것을 타지 않고, 항상 자신의 마른 말을 타고 다녔다.
1522년 (선생 22세) 9월 18일 祖母 英陽 金氏가 별세하였다. 樹谷 先塋 祖父 산소 뒤쪽에 장사지냈다.
1523년 (선생 23세) 10월 18일, 맏아들 寯(字 廷秀, 1523-1583)이 출생하였다.
이 해에 처음으로 成均館에 遊學하였다. 이때 학문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던지라 동행하는 친구도 없이 여위 종이 끄는 지친 말을 타고 혼자 서울로 올라갔다. 하지만 己卯士禍를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서 士習이 浮薄하였다. 성균관 下齋에 있었는데 마음속에 있는 것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고 지목하여 “가기가지 다 한다.”고 하며 비방하기를 그치지 않아, 두 달을 머물다가 돌아왔다. 성균관에 있을 때 처음 『心經附註』를 보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종이를 주고 한 部를 求得하였다. 이 책은 語錄體의 글이어서 사람들은 句讀을 떼지 못하고 文理를 해득하지 못하였는데, 문을 닫고 들어 앉아 여러 달 반복하여 읽은 끝에 통연하게 깨닫지 못한 곳이 없었다. 퇴계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비로소 心學의 연원과 心法의 정미함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1524년 (선생 24세) 서울에 올라가 과거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하였다. 이번까지 과거에 세 번 낙방하기는 했으나, 합격 여부에 마음을 두지 않아 크게 상심하지는 않았다. 하루는 고향집에 있는데 누군가 와서 ‘이서방’하고 불러, 퇴계는 자신을 부르는 줄 알고 자세히 살펴보니, 늙은 종을 찾는 것이었다. 내가 아직 이루어 놓은 것이 없어 이러한 욕을 당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잠깐 사이에 과거의 합격 여부에 관심을 두게 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1525년 (선생 25세) 淸凉山 寶文庵(淸凉山 紫霄峯 아래에 있었다고 함.)에 있었는데 눈바람이 열흘간 계속 몰아쳤다. 이로 인해 지난해 漢江에서 배를 타고 가는데 눈바람을 만났던 일이 생각나서 詩(「乙酉春三兄西行某時在淸凉山風雪連旬因憶往歲漢江舟中値風雪作此詩以寄情云」)를 지어서 셋째 형 漪에게 부쳤다. 이때 漪는 서울에 가 있었다.
3月 18日, 어머니 春川 朴氏 생신이었다. 생신 잔치 석상에서 여러 형들이 생각나서 詩(「三月十八日壽席憶諸兄」를 지었다.
1526년 (선생 26세) 宜寧 嘉禮의 처가에 갔다. 이곳에 있으면서 丹城縣 培養里(현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에 사는 李源을 방문하였다.
넷째 형 瀣가 成均館에 遊學하였기 때문에 어머니 春川 朴氏를 모시느라 瀣의 집에서 살았다. 이곳에서 살면서 자신의 포부를 밝힌 시(「進士兄西齋」)를 지어서 瀣에게 부쳤더니 瀣가 이 시에 次韻하였다.
1527년 (선생 27세) 가을에 慶尙道 鄕試에 응시하여 進士試에서는 1등을 하고, 生員試에서는 2등을 하였다. 생원시를 치를 때 제출한 試紙(「鄕試 試紙」가 지금도 남아 있다.
十월에 아들 寀(1527-1548)가 출생하였다.
十一月 七日, 부인 金海 許氏가 별세하였다. 榮州郡 末巖里 沙禽洞(現 慶北 榮州市 伊西面 新巖里) 石峯 東麓에 장사지냈다. 퇴계는 아름다운 배필이 일찍 돌아감을 애통해 하고, 늙어서까지도 계속 그리워하였다고 한다.
1528년 (선생 28세) 二月에 서울에 올라가 進士 會試에 응시하여 2등으로 합격하였다. 24일, 합격 발표를 기다리지 않고 도성을 나와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漢江을 건너기 전에 합격 소식을 들었으나, 그대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조금도 기쁜 빛을 보이지 않았다.
1529년 (선생 29세) 聖泉寺(現 경북 안동시 祿轉面 新坪里에 있었음)에서 글을 읽었다. 이때 함께 글울 읽던 李文樑(字 大成, 號 碧梧, 李賢輔의 아들)에게 詩 (「聖泉寺示李大成」)를 지어서 보여 주었다.
1530년 (선생 30세) 龍宮(現 慶北 醴泉郡 龍宮面)울 지나는 도중에 鶴駕山의 스님을 만나 詩 2首(「龍宮路中附鶴駕山僧寄山中李大成)를 지어서 그 산에서 글을 읽고 있는 李文樑에게 부쳤다.
安東 權氏(1513-1546)에게 장가를 들었다. 안동 權氏는 廣興倉 奉事 權礩(字 士安, 號 四樂亭)의 딸이다.
1531년 (선생 31세) 6월에 側室에게서 아들 寂(字 靜之, 1531-1608)이 태어났다. 靈芝山 북쪽 기슭 暘谷에 芝山窩舍(現 慶北 安東市 陶山面 溫惠里)를 지었다. 그런 다음 지난 戊戌年(1526년)에 지은 「進士兄西齋」 詩를 次韻(「芝山窩舍」)하여 그 일의 경과를 기록하였다. 이때 退溪는 靈芝山人이라 自號하는 한편, 자신이 거처하는 방을 ‘善補堂’이라 이름하였다.
1532년 (선생 32세) 7월 28일, 셋째 형 漪가 별세하였다.
가을에 서울에 올라가 文科 別擧 初試에 응시하여 2등으로 합격하였다. 司馬試에 급제한 뒤로는 과거에 뜻이 없었으나, 넷째 형 瀣가 어머니에게 아뢰어 응시를 하게 된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 村家에 묵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그 집에 도둑이 들었다. 함께 묵었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놀라 어쩔 줄 몰라 하였지만, 태연히 동요하지 않았다.
당시 昆陽郡守로 재직하고 있던 魚得江(字 子舜, 子游, 號 灌圃堂 混沌山人, 抱甕丈人)이 편지를 보내 내년 癸巳年(1533년)에 智異山 雙溪寺를 유람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하였다. 그래서 계사년 봄에 慶尙南道 지방을 여행할 계획을 세웠다.
1533년 (선생 33세) 退溪는 癸巳年(1533년) 1울 29일 경부터 4월 초순경까지 慶尙南道의 宜寧, 咸安, 昌原,馬山, 晉州, 昆陽 등지를 여행하였다. 의령은 퇴계의 前娶 妻家가 있던 곳이고, 함안은 퇴계의 사촌누나 (숙부 堣의 둘째 딸)의 집이 있던 곳이고, 또 다른 사촌누나(숙부 堣의 맏딸)의 집이 있던 곳이고, 곤양은 이번 여행의 계기를 마련한 魚得江이 郡守로 재직하던 곳이다. 退溪는 1월 29일 경 禮安 집을 출발하여 醴泉, 尙州, 善山, 星州, 高靈, 陜川 등을 거쳐 宜寧에 온 다음, 咸安, 昌原, 馬山 등지를 돌고, 晉州를 거쳐 昆陽으로 가서 魚得江을 만난 뒤에 4월 초순경에 宜寧을 거쳐 禮安 집으로 돌아왔다.
경상좌도 향시에 장원하였다.
1534년 (선생 34세) 式年文科 大科 會試에 응시하여 2등으로 합격하였다. 會試 初場의 講經 성적이 지금도 남아있는데, 『周易』만 粗를 받고 나머지는 모두 通을 받아 13分을 얻었다.
4월에 承文院 權知 副正子에 선임되었다. 翰林의 천거를 받아 藝文館 檢閱에 春秋館 記事官을 겸직하다가 즉시 체직되어 도로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6월에 承文院 正字로 승진되었다. 휴가를 받고 고향으로 내려와 어머니 春川 朴氏를 뵈었다. 10월에 承文院 著作으로 승진되어 조정으로 돌아왔다. 12월에 務功郞에 승문원 博士로 승진되었다.
大科에 급제한 이후로 免新禮를 치르느라 매일 같이 사람들에게 이끌려 술을 마시고 다녔다. 잠깐 틈이 난 날 무료한 마음이 생겨나서 생각해보니, 부끄럽지 아니함이 없었다고 한다.
1535년 (선생 35세) 6월에 倭人 護送官으로 차출되어 東萊에 가게 되었다. 내려가는 길에 驪州를 지나며 그곳 牧使 李純 및 訓導 李畬와 神勒寺에서 놀며 『皇極經世書』의 「觀物內篇」과 「周易參同契의」 수련법에 대해 논하였다.
12월 29일 장인 許瓚이 별세하였다.
1536년 (선생 36세) 3월 8일, 맏형 潛이 별세하였다.
3월에 宣務郞에 임명되었다. 6월에 成均館 典籍 兼 中學敎授로 승진되었다. 7월에 휴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 春川 朴氏를 뵈었다. 이때 議政府 檢詳으로 있던 넷째 형 瀣도 휴가를 받고 함께 내려왔다. 9월에 戶曺佐郞에 임명되었다.
1537년 (선생 37세) 4월에 宣敎郞에 임명되고, 5월에 承訓郞에 임명되었다. 9월에 承議郞에 임명되었다.
10월 15일, 어머니 春川 朴氏의 喪事를 당하였다. 서울에서 訃音을 듣고 넷째 형 瀣와 奔喪하였다. 居喪 중에는 너무 슬퍼한 나머지 몸이 회초리 같이 말라 병을 얻게 되었다. 특히 이때 어려서부터 고질병이 되었던 心疾이 다시 도져 거의 죽을 뻔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12월 19일, 甲子일에 어머니를 溫溪 樹谷 언덕에 장사지냈다.
1538년 (선생 38세) 朴士熹(字 德明, 號 蟠溪⦁黙齋)가 入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이때 退溪는 그의 말없음을 보고 齋號를 ‘黙齋’라고 지어주고, 性理書를 가르쳐 주었다.
朴承任에게 『禮經』과 『周易』을 가르쳐 주었다.
趙穆(字 士敬, 號 月川)이 入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1539년 (선생 39세) 12월에 어머니 春川 朴氏 3년 喪을 마쳤다.
弘文館 副修撰에 임명되었다가 그 당일 날 弘文館 修撰⦁知製敎 兼 經筵 檢討官으로 승진되었다.
1540년 (선생 40세) 1월 18일, 司諫院 正言에 임명되었다. 2월에 奉訓郞에 임명되었다가 奉直郞으로 승진되었고, 遷陵都監 郎廳으로 차출되었다. 3월에 承文院 敎檢을 겸임하였다. 4월 4일, 知製敎를 겸임하여 奉直郎⦁司諫院 正言⦁知製敎 兼 承文院 校檢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通政大夫 이하에 임명될 때는 內職에서는 으레 知製敎를 겸임하였다. 4월 30일, 司憲府 持平⦁知製敎 兼 承文院 校理에 임명되었다. 5월 7일, 司憲府 持平으로 經筵 朝講에 入侍하여 근자에 가뭄이 심하므로 정성을 다해 修省할 것을 아뢰고, 또 가뭄 때문에 자주 恩赦를 내리는 것이 不可함을 아뢰자, 임금이 嘉納하였다.
1541년 (선생 41세) 3월 4일, 弘文館 校理로 經筵 夕講에 入侍하였다. 講을 마친 다음 牛疫 문제를 논하는 것을 계기로, 牛疫 문제를 포함하여 당시 계속해서 일어나던 지진, 가뭄, 전염병 등의 문제를 두고 아뢰었다. 특히 이러한 재해는 모두 士氣가 길러주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한 다음, 지난 겨울에는 지진이 일어났고, 금년에는 전염병과 牛疫이 동시에 일어난데다, 봄 가뭄까지 더하여 흉년의 조짐이 이미 드러나고 있으므로, 더욱 修省하여 이에 대비할 것을 진언하였다. 4월에 司憲府 持平에 임명되고, 5월에 弘文館 修撰⦁知製敎 兼 經筵 檢討官⦁春秋館 記事官⦁承文院 校檢에 임명되었다. 聖節使 洪春卿(字 明仲, 號 石壁) 行次의 咨文點馬官이 되어 義州에 갔다.
4월 15일, 弘文館 副校理⦁知製敎 兼 經筵 侍讀官⦁春秋館 記注官⦁承文院 校理에 임명되었다. 義州에 있으면서 국경 도시인 의주 주변의 경관, 그곳의 제도 및 역사, 자신의 임무 등을 읊은 連作詩 12首(「義州雜題十二絶」)을 지었다.
6월 4일, 맏손자 安道가 禮安 溫惠 暘谷의 집에서 태어났다. 퇴계는 初名을 阿蒙이라고 지어주었다. 10월에 世子 侍講院 文學을 겸임하고, 11월에 司憲府 持平이 되고 12월에 病辭하였으나 옮겨 成均館 典籍이 되고 또 刑曹正郎에 임명되었다.
1542년 (선생 42세) 1월, 承政院에 傳敎하여 讀書堂 관원으로 학문 연구에 충실하도록 刑曹 正郎을 갈고 閑職에 임명하도록 명령하였다. 2월에 弘文館 副校理가 되고 겸직은 전과 같았다.
3월 19일, 忠淸道 救荒摘奸御史로 임명되었다. 4월 6일, 임금이 引見한 자리에서 救荒摘奸御史로 忠淸道 지방을 檢察한 결과를 보고하였다. 이때 悖戾 貪汚하고 救荒 政治에 성실치 못한 公州 判官 印貴孫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자 임금이 따랐다. 5월에  通德郞이 되어 舍人에 오르고 承文院 校勘과 侍講院 文學을 겸하였다. 8월에 聾巖  李公이 고향으로 가시거늘 글을 지어 이별하고, 8월 21일, 災傷御史로 임명되어 江原道로 갔다. 이 이후 15일 정도 原州牧, 酒泉縣(현 영월군 주천면), 寧越郡, 平昌郡, 洪川郡, 春川都護府, 楊口縣, 陽川縣(강원도 華川郡의 古號), 金化郡 등 강원도 嶺西地域을 돌면서 그 지역의 災害 狀況을 檢察하였다.
鄭琢(字 子精, 號 藥圃⦁柏谷)이 入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1543년 (선생 43세) 2월 병환으로 사직원을 제출하였다. 병으로 체직되어 宗親府 典籤 知製敎 兼 承文院 校勘에 임명되었다. 다시 司憲府 掌令에 임명되고, 이어서 典設司守에 임명되었다. 6월에 朝奉大夫에 임명되고, 7월에 成均館 司藝가 되고 承文院  校勘과 侍講院 弼善을 겸하였다. 8월에 朝散大夫에 임명되었다가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司僕寺 僉正으로 제수되었다. 10월에 成均館 司成에 임명되고,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와 성묘하였다. 11월에 禮賓寺 副正으로 제수되었으나 부인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비록 소환되어 벼슬에 나가더라도 조정에 오래 머물지 않고 곧 돌아왔다. 12월에 奉列大夫⦁ 禮賓寺 副正⦁知製敎 兼 承文院 參校에 임명되었다.
琴輔(字 士任, 號 梅軒 맏형 潛의 孫壻)가 入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1544년 (선생 44세) 2월 19일 弘文館 사람이 校理로 임명되었으니 빨리 올라오라는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왔다. 4월에 世子 侍講院 左弼善을 제수 받았으나 병으로 謝恩肅拜를 하지 못하고 있다가 22일, 司憲府 掌令에 임명되었다. 6월에 병으로 사직하고 成均館 直講으로 전임되었다. 또 弘文館 校理가 되었으나 병으로 체직되고 宗親府 典籤이 되었다.
8월에 홍문관 應敎에 임명되고 經筵 侍講官과 春秋館 編修官과 承文院 校勘을 겸하였다.
1545년 (선생 45세) 정월에 遠接使의 종사관이 되었으나 세 번 病으로 사직원을 낸 뒤에야 원접사 종사관에서 면직되었다. 3월에 병환으로 체직되고 內贍寺 僉正에 임명되었으나, 두 번이나 병으로 사직원을 제출하자, 임금이 휴가를 주도록 명령하였다. 5월에 中訓大夫에 임명되었다. 6월에 弘文館 應敎로서 典翰에 임명되고 겸직은 전과 같았다. 7월에 仁宗이 昇遐하고 明宗이 즉위하였다.
갓 즉위한 明宗에게 疏(「乞勿絶倭使疏」)를 올려 倭人들이 講和하기를 비는 것을 윤허할 것을 청하였다. 8월에 中直大夫에 임명되었으나 곧바로 병으로 사직원을 제출하였다. 通禮院相禮로 있다가 9월에 司餐院正에 제수되고  홍문관 典翰으로 제수되니 겸직은 예전과 같았다. 10월에 李芑가 계청하여 掌令 李天啟, 楊根 郡守 權勿, 工曹正郎 李湛, 등과 함께 官爵이 削奪되었다. 10월 22일, 職牒을 되돌려 받았다. 11월에 通訓大夫가 되고 迎接都監 郞廳으로 임명되었다.
1546년 (선생 46세) 乙巳士禍의 여파로 조정이 크게 어지러웠기 때문에 外職으로 나가기를 구하였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장인 權礩의 葬事를 지내는 것을 사유로 휴가를 받았으나, 이것도 병으로 기한을 넘겨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5월에 병으로 올라가지  못하여 해직되었다. 7월 2일 부인 安東權氏가 별세하였다. 8월에 校書館 校理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1월에 禮賓寺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退溪 東巖에 짓기 시작한 養眞菴이 완공되었다. 시내 이름 ‘兎溪’를 자신의 호 ‘退溪’로 고쳤다.
金富倫(字 惇叙, 號 雪月堂)이 入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1547년 (선생 47세) 7월에 安東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8월에 弘文館 應敎에 임명되었다. 12월에 병으로 사직하자 체직되어 儀賓府 經歷에 임명되었다.
1548년 (선생 48세) 1월에 병으로 靑松 府使로 補任되기를 구하였으나, 銓官이 몹시 준엄하게 거절하여 丹陽郡守에 임명되었다. 2월에 둘째 아들 寀의 喪事를 들었다. 8월에 鄕校에서 釋奠祭를 거행하였다. 9월에 휴가를 받고 집에 돌아와 성묘를 하였다. 10월에  豊基郡守로 전임되었다.
1549년 (선생 49세) 2월에 鄕校에서 釋奠祭를 거행하였다. 한식에 先塋에 省墓하였다. 4월에 小白山을 유람하였다. 9월에 監司에게 辭職狀을 제출하였다. 하지만 감사는 辭職狀은 수리하지 않고 휴가를 주어 조리하게 하였다. 12월에 監司 沈通源(字 士容, 號 勗齋)에게 편지를 보내 白雲洞書院에 扁額과 書籍을 내려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紹修書院’이라는 편액과 『四書』 『五經』 『性理大全』 등의 책을 내려 주었다. 병으로 監司에게 세 번째 辭職狀을 제출하였다. 그런 다음 회답도 기다리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돌아올 때 짐은 書冊 두어 상자일 따름이었다.
1550년 (선생 50세) 정월에 지난해 12월 豊基郡守로 재직하다가 監司에게 辭職狀을 제출한 다음 회보도 기다리지 않고 任所를 무단이탈한 일로 告身 二等을 削奪 당하였다. 2월에 비로소 溪上의 서쪽에 다시 터를 잡아 집을 옮겨서 지었다. 그리고 집 위쪽 시냇가에 精舍를 지어 寒棲菴이라고 이름하고, 그 精舍의 堂號를 ‘靜習’이라고 하였다. 聾巖 李公을 汾川에 가서 뵈었다. 4월에 寒棲菴 앞에 연못을 파고 朱熹의 「觀書有感」 詩 중 “天光雲影共徘徊”의 의미를 취하여 ‘光影塘’이라 하였다. 8월 하순에 넷째 형 瀣의 부음을 들었다.
1551년 (선생 51세) 2월 溪上 서쪽에 있던 寒棲菴을 철거하여 계상 동북쪽에 書堂(溪上書堂)을 옮겨지었다.
이 해에는 선생께서 벼슬을 하지 않고 집에 계셨다. 3월에 安東 馬鳴洞에 있는 5代祖 松安君의 산소에 성묘하였다.
1552년 (선생 52세) 4월에 弘文館 校理⦁知製敎 兼 經筵侍讀官⦁春秋館 記注官⦁承文院 校理에 임명됨과 동시에 조정으로 돌아오라는 召命이 내렸다. 5월 8일에 入侍하여 明宗에게 講義를 드렸다. 글에 임해, 精一執中의 교훈을 服膺하여 한결같이 이것을 지켜서 사사로움이 섞여들지 못하게 하면, 邪惡한 생각이 저절로 싹트지 않을 것이므로, 주로 해야 할 것은 公과 正이라고 아뢰었다. 司憲府 執義로 임명됨에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6월에 동료와 더불어 箚子를 올려 일을 의논하고, 병이라고 칭하고 辭職願을 제출하였으나 遞職되어 弘文館 副應敎에 임명되었다. 7월에 通政大夫⦁成均館 大司成에 임명되었다. 11월에 병으로 사직할 것을 청한 결과, 遞職되어 折衝將軍⦁忠武衛 上護軍 兼 知製敎에 임명되었다.
1553년 (선생 53세) 4월에 通政大夫⦁成均館 大司成에 임명되었다. 이때 學政이 정비되지 못하여 風敎가 頹敗해져 있었다. 退溪는 이러한 분위기를 일신시킬 목적으로 먼저 四學의 선생과 학생들에게 諭示하는 글(「諭四學師生文」)을 내렸다. 7월에 文定王后가 垂簾聽政을 거두고 明宗이 親政을 하게 되었다. 그 사실을 中外에 알리는 敎書(「大王大妃還政敎書」)를 지어서 올렸다. 병으로 사직을 청하여, 성균관 대사성에서 체직되어 副護軍에 임명되었다. 8월에 9월 5일에 시행될 親試의 對讀官에 임명되었다. 9월 14일에 景福宮 大內에 불이 났다. 이 사실을 宗廟에 고하면서 先王의 神位를 위로하는 글(「景福宮災慰安宗廟文」)을 지어서 올렸다. 折衝將軍⦁忠武衛 上護軍에 임명되었다. 10월 7일, 조정에서 庶孼 許通의 문제가 논의되었다. 이때 退溪는 國俗을 갑자기 변경할 수 없고, 또 國家의 大方을 갑자기 허물어뜨릴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庶孼 許通에 반대하였다.
鄭之雲(字 靜而, 號 秋巒)이 지은 「天命圖說」을 改訂하였다.
1554년 (선생 54세) 2월에 東宮 資善堂을 세울 때 올릴 上梁文[「東宮慈善堂上梁文(甲寅」)을 지었다. 5월에 刑曹參議에 임명되었다. 6월에 兵曹參議로 전임되었다. 7월 2일, 周愼齋의 訃音을 듣고 그의 죽음에 哭하였다 珍島 謫所에 있던 盧守愼(字 寡悔, 號 穌齋⦁伊齋⦁暗室)에게 편지하여 「夙興夜寐箴」의 주해를 의논하였다. 새로 지은 景福宮 諸殿閣의 扁額 글씨를 썼다. 8월 3일, 朝講에서 尹漑가 “퇴계가 文章도 잘할 뿐만 아니라, 理學에도 조예가 깊으므로 經筵에 두고 顧問에 대비함이 합당할 것이라”고 아뢰었다. 9월에 체직되어 上護軍에 임명되었다. 10월에 思政殿에 「大寶箴」을 써서 올렸다. 11월 10일, 上舍 洪仁祐가 逝去하였다. 訃音을 듣고 그의 죽음에 哭하였다. 25일, 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12월에 「景福宮重修記」를 지어 올리니 주상께서 말 한필을  하사하였다.
李雲龍(字 而得, 號 謙菴)이 찾아와서 가르침을 받았다.
1555년 (선생 55세) 2월에 康寧殿에다 七月篇을 써 올렸다. 병으로 세 번 사양하여 벼슬을 사직하고 즉시 성 밖에 나가 배를 세내어 동으로 돌아갔다. 이날 上護軍에 임명되었다. 僉知中樞府事를  제수하고 食物을 주시고 諭旨하여 부르시며 서울에 와서 의원에게 보이라고 하심에  글을 올려 사은하고 召命을 사양하였으나 주상께서 듣지 않고 5월에 다시  불렀다. 家廟에 祭하여 恩賜가 계신 것을 고하였다. 6월 13일, 聾巖 李賢輔가 逝去하였다. 挽詞(「知中樞聾巖李先生挽詞二首」)를 짓고, 그 집에 찾아가서 哭하였다. 先妣 金氏, 朴氏의 墓標를 지었다. 겨울에 淸涼山에  들어가서 달이 넘은 후에야 돌아왔다.
1556년 (선생 56세) 5월 18일, 弘文館 副提學⦁知製敎 兼 經筵 參贊官⦁春秋館 編修官에 임명되었다. 역말을 타고 속히 올라오라는 내용의 敎旨를 내렸다. 23일, 홍문관 부제학의 免職을 청하는 辭狀을 올렸다. 뒤에 다시 한 번 더 사장을 올려 홍문관 부제학에서 遞職되었다. 『朱子大全』을 가려 뽑아 책을 만들고 『朱子書節要』를 編次하는 작업을 마쳤다. 8월 15일, 추석에 안동에 있는 高祖父와 曾祖父의 산소에 族人들과 함께 제사를 드렸다. 9월 9일, 중구에 溫溪의 親族들과 落帽峰에 올랐다. 12월에 나라에서 鄕徒를 조직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그래서 禮安縣의 鄕立約條(鄕約)을 직접 만들고 그 취지를 밝힌 序文을 지었다. 金誠一(字 士純, 號 鶴峯)이 처음 찾아와서 가르침을 받았다.
1557년 (선생 57세) 3월에 「樹谷菴記」를 지었다. 이 記文에서 지난 庚戌年(1550년)부터 溫溪 老松亭 뒤쪽 樹谷 先塋 아래에 齋舍 樹谷菴을 짓기 시작하여 완공할 때까지의 경과를 밝혔다. 書堂을 옮겨 지을 터를 구한 끝에 陶山 南洞(현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陶山書堂 자리)에 좋은 터를 구하였다. 7월에 『啓蒙傳疑』란 책을 완성하였다.
金玏(字 希玉, 號 栢巖)이 찾아와 『四書』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았다.
1558년 (선생 58세) 2월 6일, 李珥(字 叔獻, 號 栗谷⦁石潭⦁愚齋)가 자신의 외가가 있는 江陵으로 가는 길에 禮安을 지나면서 溪上으로 退溪를 찾아왔다. 李珥는 찾아와서 먼저 퇴계의 學德을 찬미하는 詩[「過禮安謁退溪李先生(滉)仍呈一律]」를 올리자, 퇴계는 자신을 과도하게 칭찬하는 말로 가득 찬 이 詩에 次韻하지 않았다. 李珥가 가르침을 청하자, 한참 동안 묵묵히 있다가 말하기를, “마음가짐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 귀하고, 조정에서는 일 만들기를 좋아함을 경계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 李珥가 詞華를 지나치게 숭상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이를 억제하려고 그와 별도로 詩를 酬唱하지 않는 대신, 학문과 인생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4월에 『朱子書節要』의 序文을 지었다. 5월 6일, 交遊人物, 弟子, 子姪 등에게 준 편지 중에 자기 성찰의 자료가 될 만한 것들을 뽑아 엮어서 『自省錄<退陶先生自省錄>』이라 이름하고, 그 앞에 짤막한 序文[「自省錄(小序)]을 붙였다.
6월에 魚得江의 시집에 跋文(「魚灌圃詩集跋」)을 지었다.
윤 7월에 辭職疏(「戊午辭職疏)」를 올렸다. 이 疏章에서 먼저 그간 벼슬에서 물러나려 했던 과정을 갖추어 기록한 다음, 마땅히 벼슬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 곧 五不宜(諱愚竊位⦁病廢尸祿⦁虛名欺世⦁知非冒進⦁不職不退)를 들어서 致仕할 것을 간절히 청하였다. 10월에 成均館 大司成에 임명되었다. 11월에는 병으로 사양하니 上護軍에 임명된 것이다. 12월 7일, 嘉善大夫⦁工曹參判 兼 知製敎에 임명되었다. 9일, 병으로 공조참판의 면직을 청하는 글을 올렸다. 26일, 공조참판으로 謝恩한 뒤에 사면을 啓請한 결과, 공조참판에서 체직되어 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1559년 (선생 59세) 2월에 말미를 얻어 시골로 내려와 焚黃하고 병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6월 1일, 明宗이 퇴계가 두 번째로 올린 辭狀을 보고, 다시 承政院에 傳敎하기를, “工曹參判 李滉에게 조리해서 올라오라고 下諭하라.”하였다. 7월 초순, 공조참판 召命의 辭免을 청하는 세 번째 狀을 올렸다. 7월 20일, 공조참판에서 遞職되어 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12월에 『宋季元明理學通錄』을 엮기 시작하였다.
1560년 (선생 60세) 정월에 南冥 曺植의 <遊頭流錄>의 跋文을 지었다. 11월에 奇高峯에게 답장하여 四端七情을 의논하였다. 12월에 中國 사신이 오는 일로 서울로 올라오라는 召命이 내렸다.
1561년 (선생 61세) 정월에 召命이 내려 서울로 가려 하다가 마침 落馬하여 병으로 사양하였다. 8월에 안동의 太師廟 증축 記文(「安東府三功臣廟增修記」)을 지었다. 11월 「陶山記」를 完稿하였다.
1562년 (선생 62세) 3월 3일, 踏靑日이라서 답청놀이를 나갔다. 陶山書堂을 나와서 배를 타고 靑溪에 이르러 시냇가에 臺를 쌓고 靑溪臺라 하였다. 龜巖 李楨이 慶州 관내를 벗어나 陶山으로 방문하였다. 가을에 陶山書堂에서 諸生들에게 『近思錄』을 講義하였다.
1563년 (선생 63세) 1월 초순, 漢城府 判尹에 擬望되었으나, 임명되지는 않았다. 3월 11일, 黃俊良의 부음을 듣고 哭하면서 그의 즉음을 몹시 애통해 하였다.
9월 20일, 王世子(順懷世子)가 卒逝하였다. 부음을 듣고 도산서당으로 나와서 靈位를 모셔 놓고 禮를 행하였다.
1564년 (선생 64세) 閏 2월 14일, 寒食에 族人들이 모여서 안동에 있는 高祖父와 曾祖父의 산소에서 성묘하였다. 4월에 諸生과 더불어 淸涼山 유람 길에 올랐다. 이때 李文樑, 琴輔, 琴蘭秀, 金富儀, 金富倫, 權景龍, 金士元, 柳仲淹, 柳雲龍, 李德弘, 南致利, 조카 僑, 맏손자 安道 등 모두 13인이 동행하였다. 9월에 靜菴 趙光祖의 行狀을 지었다.
1565년 (선생 65세) 3월에 한글로 된 「陶山十二曲」을 지어서 도산서당에서 공부하는 子姪들이나 弟子들에게 익히게 하여, 노래 부르는 사람이나 그 노래를 듣는 사람 모두의 性情 醇化에 큰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4월에 同知中樞府事의 免職을 청하는 辭狀을 올렸다. 4월 13일, 文定王后가 逝去했다는 소식을 듣고, 도산서당에 나아가 哭臨禮를 행한 다음, 17일 成服을 하였다. 19일, 明宗이 퇴계가 올린 辭狀을 읽고 遞職을 허락하였다. 「敬齋箴圖」와 「白鹿洞規圖」, 「名堂室語」를 손수 써서 玩樂齋 벽에 걸었다. 李楨의 청으로 『景賢錄』을 改定하였다. 12월 26일, 明宗이 特命을 내려 불렀다.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1566년 (선생 66세) 1월 14일, 서울로 올라오라는 내용의 敎旨를 받았다. 27일, 榮川(榮州)에 도착하였다. 날씨가 몹시 춥고 병이 심하여 이곳에 잠시 머물면서 辭免을 청하는 辭狀을 올렸다. 2월 4일 경, 榮川(榮州)에서 豊基로 와서 明宗의 명령을 기다렸다. 2월 6일, 明宗이 퇴계의 辭狀을 읽어보고 敎旨를 내리기를 “卿의 사장을 보니, 나의 마음이 섭섭하다. 경은 모쪼록 잘 調攝하고 천천히 올라와서 누차 부르는 나의 정성을 저버리지 말라.”하였다. 2월 13일, 豊基에서 醴泉으로 와서 두 번째로 사장을 올리고, 이곳에서 明宗의 명령이 내리기를 기다렸다. 21일, 明宗이 지난 2월 13일 올린 사장을 읽어 보고 下諭하기를 “卿의 사장을 보니, 그 뜻이 간절하다. 그러나 나의 賢者를 좋아하는 정성이 독실하지 못한가 하여 깊이 개탄하는 바이니, 경은 번거로이 사양하지 말고, 편안히 조리한 뒤에 천천히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25일 밤에 여전히 退歸를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資級을 높여 資憲大夫⦁工曹判書에 임명한다는 明宗의 敎旨를 받았다. 3월 1일, 資憲大夫⦁工曹判書의 召命의 辭免을 청하는 辭狀을 올렸다. 3월 15일, 安東府에서 보낸 사람을 통해 사장을 올린 다음, 이 사장에 대한 명종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은 채 鳳停寺를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3월 16일, 資憲大夫⦁工曹判書 兼 弘文館 大提學⦁藝文館 大提學⦁知成均館事⦁同知經筵⦁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 4월에 갈려 지중추부사로 임명되고 또 교지를 내려 불렀다. 7월에 글을 올려 자헌대부의 加資와 지중추부사의 직명을 사면하시고 전의 벼슬로 치사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병의 차도가 있으면 올라오라고 명하였다.
「心經後論」을 지었다. 퇴계는 『心經附註』를 평생 尊信하여 『近思錄』 못지않게 중시해 왔고, 또 그 책에서 깨달은 바가 많이 있어서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10월에 晦齋 李彦迪의 行狀(「晦齋李先生行狀」을 지었다
1567년 (선생 67세) 2월 하순, 明나라 사신과 酬應할 製述官으로 부르는 明宗의 명령이 내렸다. 5월에 諭旨를 내려 올라오기를 재촉하므로 6월에 서울을 향해 길을 떠났다. 6월 28일, 明宗이 昇遐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烏紗帽에 黑角帶를 하고 대궐에 나아가 哭을 하였다. 7월에 大行大王行狀修撰廳의 堂上이 되어 明宗의 行狀을 지었다. 8월 1일, 禮曹判書로 謝恩한 다음 辭免시켜 줄 것을 청하는 글을 두 차례나 올렸으나, 宣祖가 윤허하지 않고 말하기를, “卿의 賢德함을 들은 지 오래 된다. 만약 지금 新政을 행하는데 卿이 出仕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안심할 수 있겠는가.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2일에는 身病으로 辭狀을 올리고, 5일에는 두 번째 사장을 올렸으며, 9일에 세 번째 사장을 올려 마침내 遞職될 수 있었다. 10일, 예조판서에서 해직이 되자 곧바로 도성을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25일, 五言排律 22韻짜리 明宗의 挽詞를 지었다.
10월 5일, 도산서당에서 명종의 卒哭禮를 지냈다. 13일, 宣祖는 大司諫 睦詹(字 思可, 號 逗日堂⦁時雨堂)의 啓請에 따라 퇴계를 龍驤衛 大護軍 兼 同知經筵⦁春秋館事에 임명하고 부르는 명령을 내렸다. 23일, 資憲大夫⦁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29일, 사장을 올려, 내린 召命을 정지하도록 특별히 명령하고, 經筵職을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는 한편, 禮에 따라 致仕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청하였다. 11월 10일,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겸 동지경연 춘추관사에 임명되었다. 12월 20일, 明나라의 사신이 오는 일로 응접하는 일이 급하였기 때문에 製述官으로 올라오기를 재촉하는 宣祖의 명령이 내렸다.
1568년 (선생 68세) 1월 9일, 出仕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陳情하는 疏章, 곧 自劾疏章을 올렸다. 13일, 宣祖가 특별히 崇政大夫⦁議政府 右贊成 兼 知經筵⦁春秋館事에 임명하고, 敎旨를 내려서 올라오기를 재촉하였다. 3월 12일, 다시 出仕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陳情하는 疏章을 올렸다. 이보다 앞선 지난 2월 16일에 또다시 진퇴를 가지고 혐의하지 말고 올라오기를 재촉하는 宣祖의 교지를 받았다. 4월 2일, 宣祖는 退溪가 올라오기를 간절히 촉구하는 내용의 敎書를 내렸다. 4월 29일, 崇政大夫 議政府 右贊成 兼 知經筵 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 5월 9일, 右贊成의 辭免을 청하는 글을 올렸다. 5월 19일, 의정부 우찬성에서 체직시켜 判中樞府事로 임명하였다. 6월 25일, 상경 길에 올랐다. 7월 24일, 대궐에 나아가 謝恩肅拜를 드렸다. 25일, 思政殿에서 朝講이 있었다. 이날 처음 經筵에 들어가서 또 宣祖에게 崇品을 改正하여 물러나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8월 3일, 弘文館 提學을 겸임하게 하였다. 6일에 弘文館 大提學⦁藝文館 大提學⦁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를 겸임하게 하였다. 8월 7일, 宣祖가 新政을 펼 때 무엇보다도 힘써야 할 것을 여섯 가지 조목으로 나누어 진술한 長文의 疏章(「戊辰六條疏」)를 올렸다. 8일, 身病으로 判中樞府事 兼 大提學의 免職을 청하는 첫 번째 辭章을 올렸다. 12일, 신병으로 두 번째 사장을 올렸다. 15일, 신병으로 세 번째 사장을 올렸다. 19일, 弘文館 大提學으로 例兼하는 實錄撰集都廳 堂上이 되었다. 20일 홍문관 대제학의 사면을 청하는 箚子를 올렸다. 23일, 홍문관 대제학으로 謝恩한 다음 辭免을 청하는 啓辭를 올렸다. 26일, 大提學에서 遞職되어 도로 判中樞府事 兼 知經筵⦁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 9월 1일, 獻官으로 康陵(明宗陵)에 朔祭를 드렸다. 3일, 經筵 夕講에 入侍하여 軍籍을 정리하는 일을 정지시킬 것을 청하는 箚子를 올렸다. 6일 夕講에 入侍하여 『小學』의 四勿箴을 進講하였다. 9일, 朝講에 入侍하여 『論語集註』를 進講하였다. 14일에 晝講에 入侍하였다. 15일, 實錄撰集都廳 堂上으로 임명되었다. 20일, 해직시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기를 청하는 箚子를 올리고, 또 대궐에 나아가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宣祖는 허락하지 않았다. 21일, 夕講에 入侍하여 趙光祖를 追崇하고, 南袞, 沈貞의 官爵을 追奪할 것을 啓請하였다. 10월 1일, 慕義殿(明宗魂殿)의 제사에 임금을 陪從하고 참석하였다. 4일, 晝講에 入侍하였다. 13일, 夕講에 入侍하였다. 근자에 빈번히 일어나는 天變과 관련해서 임금이 더욱 修省에 힘쓸 것을 아뢰었다. 25일, 夕講에 入侍하여 「董生行」을 講義한 다음, 더욱 修德에 힘쓸 것을 아뢰었다. 11월 3일, 夕講에 入侍하였다. 4일, 朝講에서 『大學』을 進講하였다. 8일, 弘文館에 들어가 장차 있을 「西銘」 講義를 대비하여 「西銘」을 校正하였다. 15일, 신병으로 사면을 청하자, 휴가를 주는 한편, 內醫를 보내 문병하고, 음식을 하사하였다. 16일, 夕講에서 『禮記』의 喪服四制를 進講하였다. 22일, 宣祖가 內醫를 보내 문병하였다. 12월 16일, 「聖學十圖」와 箚子를 올렸다. 20일 나아가 謝恩하고 또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569 (선생 69세) 1월 6일, 崇政大夫 吏曹判書 兼 知經筵⦁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 그러자 謝恩하지 않고, 당일 곧바로 身病으로 吏曹判書의 免職을 청하는 辭狀을 올려 새로 임명된 吏曹判書뿐만 아니라, 겸직한 知經筵⦁春秋館事의 직책도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나 宣祖가 허락하지 않았다. 14일, 또 다시 신병으로 이조판서의 면직을 청하는 辭狀을 올려 새로 임명된 이조판서뿐만 아니라, 겸직한 知經筵⦁春秋館事의 직책도 면직시켜 분수에 편안하게 살게 해 줄 것을 청하자, 宣祖가 이를 허락하였다. 20일, 대궐에 나아가 判中樞府事로 謝恩한 다음 辭免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하는 啓辭를 올렸으나, 宣祖가 허락하지 않았다.
2월 1일, 慕義殿의 朔祭에 陪行하였다. 5일, 여러 재상들과 함께 春秋館 史館에 들어가서 『世宗實錄』을 꺼내어 文昭殿儀軌를 상고하고, 仁宗을 文昭殿에 모셔야 한다는 취지의 廟圖와 箚子를 올렸으나, 宣祖가 허락하지 않았다. 21일, 朝講에 入侍하였다. 25일, 선인문 밖에서 차자를 올려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28일, 차자를 올려 치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3월 2일, 숭정대부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이 날 또 다시 대궐에 나아가 차자를 올려 겸대한 관직까지 아울러 체직시켜 치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3일, 知經筵⦁春秋館事를 겸임하게 하였다. 4일, 대궐에 나아가 聖恩에 감사하고, 夜對廳에 入對하여 물러갈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午正 때 하직하고 都城을 나와서 東湖 夢賚亭에서 잤다. 5일, 배를 타고 떠나서 奉恩寺에서 하루를 묵었다. 이때 당시의 名士들이 조정을 온통 다 비우다시피하고 나와서 전송하였다. 6일, 楊州 無任浦에서 묵었다. 배를 타고 오는 동안 비바람이 심한 탓에 몹시 고생을 하다가, 忠州에 도착해서 陸路로 길을 잡아 丹陽, 竹嶺을 지나 17일 집에 도착하였다.
4월 4일, 書狀을 올려 물러남을 허락해준 것과 음식물을 하사한 것에 감사하는 한편, 해직시켜 致仕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5월 3일, 端午를 맞이하여 焚黃文을 지어서 父祖의 追贈 사실을 告하였다. 20일, 「聖學十圖」 여섯 圖를 修改하여 맏아들 寯에게 부쳤다. 이보다 앞서 宣祖가 校書館에 「聖學十圖」와 箚子를 印刻하도록 명령하자, 校書館 관리들이 먼저 초벌 인쇄한 여섯 圖를 맏손자 安道를 통해 陶山으로 보내 退溪에게 校正해 줄 것을 요청하였기 때문에 修改하게 된 것이다. 7월 川谷書院의 二先生(程頤와 朱熹)의 祝文을 草하였다.
8월 5일, 明宗의 禫祀 때문에 禮安縣에 들어가서 이튿날 除服禮를 행하였다.
1570년 (선생 70세) 1월 24일 致仕를 청하는 箋과 校書館 活人署 兩司 提調의 辭免을 청하는 書狀을 인편에 올리고 待罪하였다. 2월 11일, 지난 1월 24일에 올린 치사를 청하는 箋과 書狀이 入啓되었다. 지난 11일 入啓된 致仕를 청하는 箋과 書狀에 대해 宣祖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20일, 지난 15일 내린 宣祖의 敎旨를 받고, 老病이 깊고 중해서 召命을 받고 나아갈 수 없으니, 따로 箋文을 지어서 致仕할 뜻을 아뢰겠다는 내용의 書狀을 올렸다.
3월 17일, 두 번째로 致仕를 청하는 箋을 올렸다.
4월 3일, 지난 3월 17일에 올린 두 번째로 致仕를 청하는 箋이 入啓되자, 宣祖는 허락하지 않고, 역말을 타고 올라오라는 내용의 敎旨를 내리라고 承政院에 지시하였다. 11일, 지난 3일에 내린 宣祖의 敎旨가 담긴 承政院의 書狀을 받았다. 14일, 致仕를 청하면서 召命을 사양하는 내용의 書狀을 올렸다. 25일, 지난 14일 올린 서장에 대한 답으로 내린, 속히 역말을 타고 올라오라는 내용의 敎旨가 담긴 右承旨의 書狀을 받았다. 26일, 어제 25일에 받은 召命의 辭免을 청하는 書狀을 올렸다.
5월 18일, 지난 4월 26일에 올린 召命의 辭免을 청하는 書狀에 대한 답으로 병을 조리한 다음 역말을 타고 올라오라는 내용의 敎旨가 또 내렸다.
8월 19일, 易東書院 落成式 중 禹倬을 祭享할 때 쓸 祭文을 짓고, 또 편지를 써서 이 둘을 함께 易東書院에 모여 있는 諸生들에게 보냈다. 22일, 역동서원이 낙성되어 禹倬의 位牌를 奉安하고 祭享하는 행사가 거행되었다. 9월 24일 상경하는 裵三益에게 致仕를 청하는 세 번째 箋과 치사를 청하는 書狀을 주어, 서울에 가지고 가서 崔德秀에게 전하여 承政院에 올리게 하였다. 가을에 미리 손수 墓碣銘을 지어 보관해 두었다.
10월 29일, 그때까지 敎旨는 직접 받지 못한 상태에서 지난 9월 24일에 致仕를 청하는 세 번째 箋과 書狀을 올린 결과만 朝報를 통해 확인하였다.
11월 6일, 奇大升이 부친 「聖學十圖」 第6圖 ‘心統性情圖‘의 개정이 옳지 않음을 논한 편지에 대한 답장을 보냈다. 9일, 家廟에서 時祀를 지내기 위해서 溫溪로 가서 齋宿하다가 감기에 걸렸으나, 제사를 지낼 때 櫝을 받들고 祭物을 올리는 일을 손수 맡아 하여 몸이 더욱 불편하였다. 이에 자제들이 氣候가 편치 않으시니, 제사에 참여하지 말 것을 고하자, 내가 이제 늙어서 제사를 지낼 날이 많지 않으므로, 불가불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11일, 家曆日記를 絶筆하였다. 22일 병세가 더욱 위중하였다. 24일, 退溪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원근의 제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12월 2일, 병세가 위중하였다. 약을 든 다음 말하기를, “내일은 장인(權礩)의 제사니, 고기반찬을 쓰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3일, 병세가 몹시 위중해졌다. 자제에게 다른 사람의 書籍과 屛簇 글씨를 기록해서 잃어버리지 말고 돌려주도록 지시하고, 맏손자 安道에게는 다른 사람이 빌려간 慶州本 『心經』을 교정한 책을 찾아 와서 慶州 集慶殿 參奉 韓安命에게 부쳐 板本의 오류를 수정하게 하였다. 4일 조카 寗에게 「遺戒」 받아 적게 했다. 쓰기를 마치자 직접 한 번 읽어보고는 寗에게 봉하고 서명하라고 지시하였다. 5일, 壽器를 마련하라고 지시한 다음, 제자들에게 3~4일을 더 지탱하면 다행이라고 하였다. 7일 李德弘에게 書籍을 맡으라고 지시하였다. 退溪의 병세가 너무 위중해서 제자들이 점을 쳤는데, 謙卦의 “君子有終”이란 占辭를 얻고 모두 실색하였다. 8일, 아침에 盆梅에게 물을 주라고 지시하였다. 酉時(오후 5시-7시)初에 누운 자리를 정돈하게 하고는 부축을 받고 일어나 앉아서 편안하게 逝去하였다. 18일, 宣祖는 退溪가 逝去했다는 訃音을 듣고, 領議政을 追贈해서 그에 맞추어 致賻⦁弔祭⦁禮葬(國葬) 등의 제반사를 조처하게 하였다. 21일,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겸 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를 追贈하였다.
1571년 (선생 71세) 1월에 遺命에 따라 맏아들 寯이 上疏하여 禮葬(國葬)을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2월, 맏아들 寯이 上疏하여 禮葬(國葬)을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3월 21일, 禮安縣 搴芝山 남쪽 줄기 子坐 午向 언덕에 장사지냈다.
1571년 (선생 71세) 1월에 遺命에 따라 맏아들 寯이 上疏하여 禮葬(國葬)을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2월, 맏아들 寯이 上疏하여 禮葬(國葬)을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3월 21일, 禮安縣 搴芝山 남쪽 줄기 子坐 午向 언덕에 장사지냈다.
1572년  
1573년 9월 24일, 宣祖는 退溪의 著書는 片言隻字라도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이므로, 그 文集을 校書館에서 印出하라고 禮曹 등에 지시하였다. 11월 1일, 伊山書院(現 慶北 榮州市 伊山面 伊山里)에 退溪의 位版을 奉安하고 釋菜禮를 거행하였다.
1574년 봄, 陶山 남쪽에 書院(陶山書院)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1575년 여름, 書院이 落成되자 ‘陶山書院’이라는 懸板을 내렸다.
1576년 2월 13일, 陶山書院에 位版를 奉安하고 釋菜禮를 거행하였다. 이날 廬江書院에도 退溪의 位版을 奉安하고 釋菜禮를 거행하였다. 11월 10일, 宣祖는 退溪에게 ‘文純’이라는 諡號를 追贈하였다. 道德博聞한 것을 ‘文’이라고 하였고, 中正精粹한 것을 ‘純’이라고 하였다.
1577년 2월, 墓碣을 세웠다. 작은 돌에다가 「遺誡」에 따라 앞면에는 직함 대신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쓰고, 뒷면에는 退溪 자신이 미리 지어 놓은 「自銘」을 앞에 놓고 뒤에 奇大升이 撰한 後序를 붙인 墓碣銘을 새겼다. 글씨는 당시 宣城(禮安) 三筆로 일컬어지던 琴輔가 썼다. 墓碣 외에 따로 神道碑를 세우지는 않았다. 윤8월 14일에 誌石을 묻었다.
1596년 윤 8월 14일, 誌石을 묻었다.
1600년 5월, 退溪文集 49卷, 別集 1卷, 外集 1卷의 板本을 새기는 작업을 완료하였다.
1610년 4월, 宣祖 廟庭에 配享되었다.